[연속기획]안경전의 9000년 한민족사 이야기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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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의 민족 강역을 나타내면서 당시의 기술과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유물인 비파형 동검(왼쪽)과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한국사 교과서에는 단군조선이 간략하게나마 언급됐지만 사실 일반인들에게 단군조선의 유물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눈으로 확인되는 유물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단군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요서지역의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이 그 상징적인 유물입니다. 이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져 아주 단단합니다. 납 성분이 많이 섞여서 상대적으로 단단하지 못한 중국의 동검들과는 다릅니다. 녹는 온도가 서로 다른 청동과 아연을 합금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단군조선의 청동기 문화 수준은 아주 높았습니다. 청동단검을 만드는 거푸집(용범鎔范)도 같이 발견돼 이 동검이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게 아니라 한민족이 직접, 대거 제작한 것임을 알게 합니다. 단군조선의 기술이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물은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여러 꼭지 잔무늬 거울)입니다. 청동판에 새겨 넣은 선의 굵기가 머리카락 한 올만큼 정교한 이 청동 거울은 세계에서 오직 단군조선 문화권에서만 발굴됐습니다.

단군조선을 살았던 우리 조상은 청동기 유물과 함께 거석(巨石)유적인 고인돌도 많이 남겼습니다. 고인돌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입니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단군조선 영역이던 만주와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한반도만 해도 대략 4만 기(基)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무게가 적게는 10t에서 많게는 300t에 이르는 돌을 채석해서 무덤을 조성하려면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군조선은 그만큼 조직적인 국가체제와 권력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인돌은 그 주기능이 무덤이었지만 갈수록 기능이 확대돼 제단 또는 마을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단군조선 때는 삼베, 면, 비단을 생산하고 염색된 천을 활용해 다양한 색깔 옷을 만드는 등 복식(服飾)문화도 발달했습니다. 당시 직조법(織造法)과 염색기술은 중국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단군조선 시대 유적지에서 나오는 복식 유물들을 보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장식했다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한국의 일부 강단사학자는 단군조선이 '그저 유치한 단계의 부족국가였다'라는 주장을 내놓는데 이는 다양한 유물의 종류나 그 기술수준을 따져보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밖에도 만주에서는 수많은 적석총(積石?)과 성터, 제천단(祭天壇) 등 단군조선이 동방 제천문화의 원주인으로 실재(實在)했으며 그 문명 수준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들이 무수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 2천 년 동안 주변국,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초대 단군 때부터 중원 땅(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중원이 단군조선에 예속된 관계였습니다. 하(夏)나라가 등장하기 직전 단군왕검 즉위 50년 되던 정사(丁巳)년 동북아에 9년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이 대홍수로 중국의 요임금, 순임금 정권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요임금 때 치수사업 책임자가 곤(鯤)이라는 관리인데 치수에 실패하는 바람에 처형됐습니다. 그 뒤를 이어 곤의 아들인 우(禹)가 치수사업을 맡았습니다. 그는 당시 중국이 상국(上國)으로 여기던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 기록된 금간옥첩을 전해 받았습니다. 이 오행치수법으로 오랫동안 중원을 괴롭히던 홍수 문제를 마침내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가 민심을 얻고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BCE 2205년~BCE 1766년)를 열었습니다. 앞서 순임금 때부터 단군조선에 비해 약세였던 중원은 국가 존망의 절정에 처했던 9년 홍수 문제에 도움을 받은 이후, 하나라 때 와서도 동방의 신교문화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단군조선에 예속됐습니다.

하나라에서 상(尙)나라로 왕조가 교체(BCE 1766년)되는 데도 단군조선의 정치력과 군사력이 작용했습니다. 우가 열었던 하나라는 나중에 폭군인 걸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이에 상나라의 초대 탕왕이 폭군 걸을 정벌하고자 했습니다. 이 무렵 단군조선을 다스리던 제13세 흘달단군은 처음에는 걸을 지원했습니다. 그래도 걸의 폭정이 그치지 않자 결국 탕을 지원해 상나라가 이기게 했습니다.

-마땅히 상나라 이후에도 단군조선을 받들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상나라(BCE 1767년~BCE 1122년) 역시 선대 왕조들에 이어 단군조선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상나라의 제12대 하단갑 때부터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 전까지 이어지던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고는 심지어 제22대 무정 때 이르러서는 단군조선의 변방을 침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단군조선의 제21세 소태단군과 제22세 색불루단군이 상나라를 쳤습니다. 단군조선과의 대결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상나라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상나라 이후 550년 동안 중원을 지배한 주나라(BCE 1122~BCE 256) 역시 동방 동이족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세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주나라는 한족(漢族)이 일으킨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를 창건하고 융성케 한 문왕과 무왕은 모두 동이족 출신입니다. 이들은 앞서 상나라보다 군사력은 약했으나 동이족, 곧 단군조선의 지원을 받아 주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문왕과 무왕 이후 주나라는 앞선 왕조들처럼 단군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했습니다. 주나라의 건국(BCE 1122년)을 도운 동이족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강태공입니다. 나중에 주나라의 무왕이 강태공을 산동반도의 제나라 제후로 봉한 것도 동이족 출신인 그가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역사기록들은 일찍이 단군조선이 동북아의 천자국(天子國)으로 중국의 고대 세 왕조인 하·상·주를 정치적으로 지배했음을 보여줍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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