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주던 마음 날 버렸나"

님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情)을

뉘손대 옮기신고



처음에 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 송시열(宋時烈)
옛날 우리 조상들은 군신(君臣)간의 대화(對話)를 작품을 통하여 대신한 경우가 많았다. 이 작품 또한 그러한 경우로 신하가 임금의 마음이 변했음을 원망하는 노래이다.

송시열(宋時烈)은 조선 숙종 때의 정치가요, 철학자로 자를 영보(英甫), 호를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라 하였다.

충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김장생(金長生)에게 글을 배웠고, 인조 11년 장원급제하여 효종(孝宗)이 세자일 때 그의 사부(師父)였다. 뒷날 율곡(栗谷)의 학문을 계승한 대학자로서 노론(老論)의 수령으로 활약한다.

숙종 15년에는 세자 책봉(冊封)을 반대하다 멀리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워 하며 임금의 마음이 변했음을 슬퍼하고 이 시조를 읊는다.

'임이 나를 헤아려 주시므로 나는 꼭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누구에게 옮기셨는가. 처음부터 미워했으면 이다지도 서럽겠는가'라고 자신에 대한 임금님의 사랑이 식어버렸음을 직설적으로 탄식하고 있다.

그는 얼마 후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숙종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는다. 님은 갔지만 역사적인 큰 인물로 존경을 받는다.

대전시 동구청에서는 가양동 소재 우암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우암사적공원(尤庵史蹟公園)'으로 지정하고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문화제 행사를 매년 개최한다. 선생의 사상은 그가 문하생을 강론하던 사당을 스스로 '이직당(以直堂)'이라 현판을 걸만큼 '정직(正直)'을 본으로 삼았고, '의리(義理)'를 실천하여 후세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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