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속 역사이야기⑤]신경직 LH공사 충북본부 부장

조선시대 최대의 비극인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누가봐도 이순신 장군의 해상권 장악과 의병봉기에 있다. 이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충절의 고장 충청도에도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수많은 충신들과 얽힌 지명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부고속도 청주IC에서 나와 청주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전국의 10대 아름다운 길’로 뽑힌 청주의 명물 가로수길이 나온다. 바로 이 가로수길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守儀洞)이다. 원래 예전부터 이 마을에는 충의와 절의를 지킨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해 수절(守節), ‘숫절’, 수의동(修義洞)이라 불리워왔던 곳인데 1914년 일제(日帝)의 행정 구역 개편 때 현재의 수의리(守儀里)로 바뀌었다. 이곳의 이름에 어울리게 이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두 번째로 벌어진 동래성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순절한 천곡 송상현의 묘와 충열사라는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송상현의 자는 덕구(德求)요, 호는 천곡(泉谷)으로 본관은 여산이다. 왜란이 발발하자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鄭撥)은 결사적으로 분전했으나 순국하고, 결국 부산포진을 빼앗기고 만다. 왜적은 다음날인 4월 15일 동래성으로 쳐들어왔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군을 맞아 성문을 굳게 닫고 항전하다 끝내 42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당시 왜장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송상현의 순국은 향후 의병 봉기의 시발점이 됐다.

청주에서 충주로 나가기 직전에 ‘수름재’라는 고개가 있다. 이곳의 행정지명은 주성동(酒城洞)이다. 한자만 살펴보면 술(酒)과 관련이 있는 고개(峴)로 착각하기 쉽지만 지명의 유래를 살펴 보면 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수름재는 청주 주성동에서 묵방리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명문가 한산 이씨들이 이곳에 정착한지 10여년이 지난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왜적을 피해 이곳을 지나던 한산 이씨들이 무참하게 참살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산 이(李) 씨의 원수(讐)가 된 고개’란 뜻으로 ‘수이현(讐李峴)’ 또는 ‘수리재’라 불리던 것이 차츰 ‘술름재’, ‘술재’, ‘수름재’로 변화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이 수름재, 술재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술 주(酒)자’를 잘못 사용해 주성(酒城)이라 표기하면서 오늘에 주성동, 주중동이 됐다는 전언이다.

충남 금산군에는 의총리(義塚里)라는 곳이 있다. 이 의총리는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는 유적지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임진란 초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들은 청주성을 탈환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충남 금산으로 가서 왜적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700여명의 의병들이 모두가 이곳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자, 이후 이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 위치하면서 ‘의총리’라는 지명이 지어졌다. 이처럼 우리 충청지역에는 민족 수난사인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이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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