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전인준 음성여자중학교 교사

어마무시했던 열대야와 피서의 계절이 슬그머니 꽁지를 빼며 아쉬움과 안도감으로 감정의 빛깔을 섞어 놓고 있다. 간절이 다가오는 기미를 제일 먼저 알리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건, 역시 바람이다. 추석 때까지는 늘 뜨거운 날들이었다는 걸 기억하면서도 말복의 첫 글자가 낮 최고 기온을 10도쯤 흡수해 가져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올 여름엔 이런저런 이유로 더위라는 적을 피해 멀리 도망가지 않고 내 집에 엉덩이 붙이고 심지어 벌렁 드러누워 적을 물리치는 '홈캉스'라는 말이 오르내렸다. 더위를 피해 밖으로 도망가면 '바캉스', 집에서 물리치면 '홈캉스'라니….

홈캉스의 대표적 프로그램은 휴식과 독서라고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면 1년에 한 번 뿐인 당당한 휴가를 집에서 보내려 하나 안쓰럽기도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된다. 쉴 휴(休)자에서 나무를 떼어내고 집을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필자에게 반갑게 눈에 들어온 건 홈캉스의 두 번째 프로그램이 독서라는 것이다. 선풍기 앞에 배 깔고 아작아작 과자 씹는 소리를 효과음으로 만화책을 읽고픈 소망도 물론 포함될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묘한 구석이 있다.

어른이 되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데에서 다소 면책이 된다. 누군가 굳이 잔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 티가 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왠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갖게 한다. 장기간 못하게 되면 약간 불안하기까지 하다. 이 증세가 심각해지면 내 생활과 인생의 의미까지 통틀어 의심하며 자신을 컴컴한 우물 속으로 던져 넣고 때때로 퍼올린다.

혼자 읽기는 수많은 덫과 복병을 만나기 때문에 웬만한 장수가 아니고서는 항복과 포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했던가? 그래서 필자는 쭈빗쭈빗 용기를 내어 책 읽는 모임에 발을 담갔다. '연애 소설 읽는 모임'이라는 주제 독서가 매력적이었고 오랜만에 찐한 사랑 얘기를 읽으며 설레고 싶은 기대에 부풀기도 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 클럽'은 우리가 만난 첫 작품이다.

매달 2시간을 운전을 마다않고 달려오시는 안정희 작가를 중심으로 책방 사장님 부부, 시청 공무원, 상담사, 중학교 사서, 도예가, 상담사, 자영업자, 경찰 아저씨, 공군 총각, 동화작가 등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읽을 책을 고르고, 읽은 생각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역시 함께 걸으니 멀리, 오래 걸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건지 아일랜드, 미 비포 유, 나를 보내지마, 척하는 삶,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검의 대가, 두근두근 내 인생 등이 지금까지 만난 작품들이다. 중등 교사로 필요에 의해 읽어 오던 청소년 권장 도서나 자기계발서, 지식 넓히기용 독서에서 한 걸음 비껴나 다양한 작가들이 빚어내는 이야기의 숲을 거니는 기쁨은 우물 속에 던져진 삶의 의미를 건져내 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독서 모임의 행복을 나누고 싶어 주변 선생님들의 의견을 물어 교사독서모임을 만들었다. 모두들 불러 줘서 고맙다고, 오랜만에 '나'로서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즐거워하신다. 책 읽는 행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미련이 있는 우리들…. 이제 혼자 읽기의 외로움에서 벗어나 함께 멀리 갈 수 있는 소박한 북클럽을 만들도록 쭈빗쭈빗 용기를 내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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