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속 역사이야기] ③
신경직 LH공사 충북본부 부장

14세기 말 권문세족이 득세하고, 외적의 침입 등으로 고려의 국운이 서서히 기울어져 갈 즈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결국 조선을 건국(1392년)하기에 이른다.

건국의 명분을 얻고자 이성계는 제일 먼저 널리 명망있는 인재를 등용했고 조정에 나아갈 지, 아니면 낙향할 지를 놓고 고민했던 당시 벼슬아치들의 고민이 흔적으로 남아 전하는 지명이 있다.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三訪里)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이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마을이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배극렴(裵克廉·조선 최초의 영의정으로 1등 개국공신)이란 인재를 얻기 위해 세 번이나 방문했다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삼방리 마을유래비에 의하면 고려말 왕의 시역사건이 일어나자 배극렴은 정사에 뜻을 잃고 낙향해 이곳 괴산의 어래산(御來山)에서 은거를 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배극렴을 국정에 참여시키고자 손수 이곳을 찾았으나 배극렴이 나타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이후 이성계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도 배극렴을 만나지 못했다. 이성계가 세 번째 찾은 끝에 마침내 배극렴을 만나 집권계획 등의 국사를 논하고 배극렴을 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바로 삼방리(三訪里)였다.

또, 이 마을의 어래산(御來山)은 이 같은 맥락의 이야기로 ‘임금이 산을 찾아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삼방리(三訪里)의 전설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가 당대 최고의 인재인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했다는 고사를 차용, 유비와 이성계를 동격으로 올려놓고자 했던 것으로도 해석된다.

반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해 충절을 지킨 인물들의 이야기 또한 상당수 유래하고 있다.

청주시 상당구 오창면에 ‘모정리’라는 농촌마을이 있다. 원래 이곳에 띠모(억새풀과의 여러해사이 식물)로 지은 정자가 있어 모정리(茅亭里)라고 했다가 나중에 모정리(慕亭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에 띠로 지은 정자를 지은 사람은 고려의 충신인 김사렴(金士廉·고려의 충신 두문동 72현 중 한 분)이며, 김사렴이 조선 건국에 반대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이곳에 띠집(茅亭)을 짓고 살았다고 하여 모정리(茅亭里)가 유래됐다.

또, 청주시 상당구 현도면 죽전리(竹田里)는 고려의 충신 안세현(安世賢)이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고자 이 곳 죽전리에 낙향하게 된다. 안세현은 선조들의 굴하지 않는 절개와 의리를 추모해 조선 조정에서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이 마을에 숨어 자손을 가르치며 대나무를 심어 놓고 책을 벗삼아 살았다고 해 마을 이름이 죽전리라 불렸다.

이외에도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하는 충북 단양군 도전리(道傳里), 고려의 충신들이 속세를 떠나 세상을 등지고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며 깨끗한(白) 선비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兩白里) 등이 있다. 이처럼 우리지역에는 조선에 협조한 인물들과 거부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지명으로 전해질 만큼 조선건국의 중추적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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