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재발견⑩ 동구 원동 헌책방 거리
중앙시장 한복거리 입구 헌책방 골목
고려당·영창·부여서점 옹기종기 모여
수만권 책더미 수십년 역사 고스란히
지식도 쌓고 옛 추억도 느껴볼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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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XXX의 앞날에 양식이 되기를…. 항상 널 생각하는 XX가 19XX년 X월.”


군데군데 해진 겉장을 넘기자 본래 책을 가졌던 이들의 사연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어떤 책에는 연인을 향한 사랑의 시가, 또 다른 책에는 받는 이의 성공을 비는 격려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는 대학생이었고, 누군가는 앳된 문학소녀였으리라. 한 장, 한 장, 켜켜이 묻은 손 때는 더러움이 아닌 추억이다. 새 책이 대체할 수 없는 헌 책만의 매력이다.

대전 동구 원동의 중앙시장 한쪽, 한복거리 입구 즈음에 위치한 ‘헌책방 골목’에는 이런 추억이 한가득 쌓여있다.

추억도 추억이지만, 500원부터 시작해 2000~3000원 저렴한 가격에 책도 얻을 수 있는 곳이니 한나절 시간 보내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원동 헌책방 골목은 1958년 자리를 잡은 ‘원동서적’을 시작으로 6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공간이다. 이후 고려당서점과 청양서점, 영창서점, 성실서점 등이 문을 열면서 번창하기 시작했고, 80년대에 이르러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한 때 30개가 넘는 서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10개 남짓의 헌책방이 성업 중이다. 한복거리 입구로 들어서는 상가 모퉁이에는 고려당과 영창서점, 부여서점이 3형제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서점 앞과 옆, 인근 고가도로의 밑에까지 고즈넉한 모습으로 쌓여있는 책더미가 이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 중 맏형은 일대의 가장 오래된 서점이란 ‘타이틀’을 지닌 고려당서점이다. 장세철(80) 할아버지가 45년째 지키고 있는 지식의 보물창고다. 문학전집부터 전공서적, 참고서, 최신 소설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다.

모두 합쳐 5만권에 달한다는 책이 사람 키 높이까지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다. 이 중 ‘특화된 분야’가 뭔지 물으니, 장 할아버지는 순서도 규칙도 없어보이는 책더미 속에서 특별포장 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게 150년전 중국 상해에서 발행된 ‘자미두수(중국 도교 점술서)야. 전국 어디에서도 구하기 어려워. 아주 귀중해.”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고서들이 많다는 게 장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큰 길가로 상가를 빙 돌면 육일서점이, 그 뒤쪽으로 다시 돌면 또 다른 서점가가 나온다.

이 중 그나마 최근인 4년 전 장사를 시작한 국민서적에 들어서니 역시나 책이 한 가득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분야의 책을 망라한 곳이지만, 굳이 강점을 꼽는다면 소설과 역사분야 서적이다.

지금은 수십만 원을 줘도 구하기 어렵다는 전설(?)의 무협소설 ‘영웅문’ 한 질이 떡하니 놓여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 편에는 알 수 없는 가문의 족보들까지 구비돼 있다.

고려당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동안 모은 책이 어느새 3만권. 마음먹고 들어앉으면 책을 둘러보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국민서적의 주인은 이창수(55) 사장. ‘고려당에서 오래된 고서를 보고 왔다’며 자존심을 슬쩍 자극하니 이 사장은 질 수 없다는 듯 ‘가람시조집(1947)’을 비롯한 옛날 서적들을 한아름 들고 나왔다. 다른 서점과는 조금 거리를 둔 청소년위캔센터 맞은편에는 일대 최대 규모의 청양 서점이 있다.

다른 서점의 2~3개 크기의 이곳에는 주인인 김영수(39) 사장도 “책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많은 책이 있다. 마치 미로 같은 형태의 내부에는 키를 넘기는 책장이 들어차 있는데, 그 와중에도 각각의 분야에 따라 정리가 잘된 점이 특징이다.

아버지 김진문 씨에 이어 2대째 서점일을 하는 김 사장은 책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추억어린 책 한권 전해주는 것에서 적잖은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최근에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의 발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고가의 어린이용 전집을 싸게 살 수 있고, 다시 되팔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핏 고리타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지식과 추억을 느낄 수 있는 곳 원동 헌책방 거리. 이번 주말 갈 곳 없어 걱정이라면 한 번 이곳을 찾아보는게 어떨까.

김영준 기자 kyj85@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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