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민주화 투쟁 영원한 'DJ맨'

길이 아니면 가질 않았고 까마귀 노는 곳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등 따습고 배부른 야합보다는 굽이굽이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으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쳤다.
격동의 세월을 고스란히 이고 지고 살아온 인생, 그래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후회는 없다.
일평생 민주와 민족이라는 화두를 좇은 송좌빈(宋佐彬·79) 옹, 칼바람이 한껏 기세를 부리던 날 만난 그의 모습은 더욱 꼿꼿해 보였다.
일제시대 창씨개명 거부에서 지난 87년 6월 민주항쟁 주도에 이르기까지 제도권의 '모난 돌'을 자처한 그의 피에는 올곧은 선비 정신이 흐르고 있다.

철모르는 8살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의 슬하에서 자란 송 옹은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조부 송종국(宋鍾國) 선생은 마지막 왕세자 이 은의 시종관(당상관급)을 역임하다 왕세자가 역사의 희생양이 돼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땅에 은둔한 충신.

"대전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온 나라가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창씨개명으로 들썩일 때 조부님이 말씀하십디다. '항일은 못할지언정 반일은 해야지 않겠냐'고, 끌려가도 당신이 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해방을 목전에 둔 즈음에는 병역소집에 불응, 도망자 신세가 됐다.

"조부께서 풍수학자에게 미리 기별을 넣어 경상도와 충청도 경계의 첩첩산중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이라야 화전민 2가구가 전부였던 말 그대로 '깡촌'이었지요. 달랑 쌀 한 말 지고 들어갔으니 초근목피로 생명을 부지할 수밖에요. 그래도 간간이 허공을 나는 비행기를 보며 조만간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조국은 좌·우 날개의 극한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연희전문 정치외교학과에 재입학했을 때 남쪽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경계로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이북이 공산주의 이념화에 안착한 것과는 대조를 이뤘지요. 공산주의는 그 모태가 혁명 아닙니까. 모든 사회규범과 제도를 한꺼번에 뒤집는다는 명목으로 살육과 폭력이라는 수단을 도용하는 것이 공산당의 혁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빵보다는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요."

그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은 한 인물에 대한 동경과 멸시라는 부조리로 대변된다.

당시 남한의 대표적 정치 지도자 이승만 박사, 한때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그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결국 민주화를 저해하는 독재자로 낙인찍혀 반대의 길에 서게 됐다.

6·25 동란 중 자원 입대한 것도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싶은 그의 충심이 묻어 있다.

"정훈장교를 뽑더라고요. 전장의 소대장이 되고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훈은 그것과 거리가 먼 병과입디다."

예비역 대위로 예편한 그는 지난 56년 민주당 대덕군 당 부위원장을 시작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다.

험준한 야당생활, 언제나 '반대 쪽'에만 섰던 그의 외길 인생이 순탄할 리 만무했다.

"5·16이 발발하자 또 하나의 독재의 길이 열리겠다는 확신이 들더군요. 그래도 얼마간 지켜보기로 했는데 역시나 자유당에 버금가는 독재가 활기를 칩디다.

군사정권으로부터 정치활동 정치범으로 규제를 받은 그는 이듬해인 62년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유로 옥살이를 한다.

"군 출신 몇 명과 계를 조직했어요. 마침 우리 집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술김에 감시나온 지서 사람에게 폭언을 퍼부었지요. 곧바로 나를 지목해 계엄포고령 6호를 위반했다며 실형 1년을 언도했습니다."

1개월을 살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는 야인(野人)에 대한 탄압의 서곡에 불과했다. 헌정동지회를 결성한 79년, 불온문서 소지죄로 실형을 선고받고 팔자에 없는 두 번째 수감생활을 하다 10·26후 면소 조치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전두환 군부 독재 퇴진 및 민주화 운동 혐의로 보안대에 연행돼 나흘간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

정치를 시작한 마당에 선량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테지만 그는 총선에 세 번 출마하는 동안 한 번도 국회의원 배지를 손에 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어려운 싸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패한 정권과 군부에 대적해 민주의 깃발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죠. 연설회를 통해 마음 속 울분을 마음껏 토해 낼 수 있었으니 성공한 것 아닙니까."

정객 이전의 본업은 농사꾼, 만석지기는 몰라도 토착지주였던 그는 벼 심고 수박이며 포도를 재배하고 양봉도 했다.

오랜 재야 정치인 생활은 10만평에 이르던 임야와 1만평의 밭을 곶감 빼먹듯 감쪽같이 소진시켜 버렸다.

골수 야당을 고수하던 그는 74년 정통성을 상실한 통일당을 탈당해 백의종군, 재야로 편입된다.

"정치인 하면 구질구질하고 뒤가 구리다고 손가락질 받을 만큼 그 기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앞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재야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민주회복 국민회의 대전·충남 지부(78년)와 민주 헌정 연구회(85년), 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87년), 용공조작 및 고문철폐 시민궐기대회 대회장(87년) 등은 그의 활동을 대변하는 이력서.

송 옹은 자타가 공인하는 영원한 'DJ맨'이다.

"당내 계파를 달리했음으로 처음부터 그를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68년 당 총무 경선에서 YS에 패한 뒤 자신만의 계보를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보내오더군요. 그때도 한마디로 'NO'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반한 건 대전 강연 때문이었어요. 한마디도 소홀히 할 것이 없습디다. 사람이 달리 보일 수밖에요. 청주로 전주로 원정을 다니며 강연을 듣고 그 답 정을 주게 됐습니다."

79년 옥살이도, 87년 정계 복귀도'DJ'를 대한 일편단심의 편린일 뿐이다.

그의 애정을 받으면 큰 일을 내는 모양이다.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청문회를 기화로 송 옹의 관심권에 들었다.

"그만한 사람이 없습디다. 일거수일투족에 이목이 쏠리더군요. 철학이 있고 순박하잖습니까. 김 대통령과 공통점이 있어요. 자기계발에는 아낌없이 투자한다는 것이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한 그에게 후회는 없다.

"새 정부 출범하고 당 조직이 안정되면 물러나야죠. 민주동우회를 사랑방삼아 민주화된 나라의 밝은 앞날을 지켜보렵니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를 애국애족의 소중함이 새삼 값지게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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