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세평]유제봉 EMK이엠생명과학연구원 원장

지금 우리나라는 정직하지 못한 부도덕한 모 기업인의 자살사건으로 인해 온통 나라가 시끄럽다. 매스컴도 이에 뒤질세라 연일 뉴스거리로 도배를 한다. 이제 국민들도 진력이 날 정도로 피로감이 표출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단죄를 받을 사람이나 제기한 사람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나라는 아직도 지금의 사태를 수습할 만한 인재의 등장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찾지 못하는 것일까.

17세기 중·후반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국가적 당위에 직면해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결국 일본과 청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명나라의 동맹국인 조선을 먼저 친 것이었고, 그 양란의 결과는 조선의 황폐와 명나라의 멸망, 그리고 청나라를 중원의 주인이 되게 하여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의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조선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으며, 이 시기에 조선이 필요로 한 것은 강력한 국가 지도 이념을 구상하고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의 등장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인물이 바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년)이다.

어느 때인가. 황희가 정승이 되었는데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담장도 없이 초라하게 살아간다는 얘기가 돌고 돌아 세종의 귀에까지 전달된다. 세종은 황희를 위해서 비밀리에 공조판서를 불러들여 황희의 집 주변에 몰래 담장을 쌓으라고 명을 내린다.

공조판서는 건축업자 여러 명을 모아 정승이 눈치 채지 않는 비가 오는 밤 시간을 틈타 황희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는 서둘러 집 둘레에 담장을 쌓기 시작했는데 어쩌다가 갑자기 한 쪽의 담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소리에 놀라 황희가 방문을 열자 이들의 행실이 밝혀지게 됐다. 공조판서는 황희에게 그 즉시 불려가게 되었는데 공조판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황희는 비록 자신이 정승이지만 아직 백성들은 가난하게 담장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담장을 쌓으라고 했던 세종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주청했다. 그러자 세종은 이에 감탄하고 오히려 정승을 더욱 신뢰하게 됐으며 신하들도 황희의 청렴함에 감격하기도 했다.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던 후반에 들어서는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화 창달에 전념하고 거의 모든 정사를 영의정 황희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조정 신료와 백성은 영의정 황희에게 나라의 대소사를 모두 의뢰했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일관된 바른 정치와 탁월한 능력과 인품은 더욱 돋보였다.

역사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조선 전기 즉, 세종이 다스리던 시기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세종의 시기는 왕권과 신하의 권력이 조화를 이루며 토지제도, 지방 수령제도, 군사체계 등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각종 제도가 정비됐고, 이러한 태평성대는 성군 세종대왕과 명재상 황희 정승이 힘을 합쳐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조선왕조 500여년에 걸쳐 가장 어질고 슬기로운 재상으로 손꼽히는 황희 정승은 고려 말 개성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고려의 신하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황희는 벼슬을 버리고 고려의 충신 수십 명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의 묘가 있는 개성 송악산 두문동에 은거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대표적인 청백리인 방촌 황희정승, 태종 세종 문종에 이르는 3대를 내리 섬겼고, 나이 90줄에 들어서서도 정정한 기운으로 나라 일을 두루 살폈다는 황희정승, 거만하거나 화내는 일이 없고 너그럽고 덕이 넘쳤다는 황희정승, 후대 사람이 세종을 세종대왕으로, 황희를 황희 정승으로 높여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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