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이근규 제천시장

남몰래 ‘비천한’ 여인을 사랑한 귀족청년은 어느 날 그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례식장을 찾은 그는 조문객들 속에 숨어서 어깨너머로 장례식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본다.

마침내 그 여인이 누워있는 관이 무덤 안에 내려지는 것을 본 순간, 귀족청년은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한다.

그리고 그 청년은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가 관에 입을 맞추며 외친다.

이 뚜껑을 열어주시오. 내 사랑하는 이 여인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소. 그녀의 마지막 얼굴을 보아야 하겠소.

난데없는 귀족청년의 울부짖음에 당황한 가족들은 놀라움 속에 웅성거렸다. 이내 사태를 짐작하고 그 청년의 뜻을 받아주기로 하였다. 관 뚜껑을 잠시 열어 주기로 한 것이다. 귀족청년은 그 여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잘 가라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고, 볼에 키스를 한 후 오열했다. 그렇게 귀족청년은 진실을 밝히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떠나보냈다. 이 강렬한 기억은 청소년기에 헌책방에서 사서 읽었던 소설 속의 장면이다. ‘마농레스코’는 현대문학사에 최초의 연애소설로 꼽히는 고전으로, ‘비천한 계급’의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한 ‘귀족 청년’의 이야기이다. 계급사회였던 중세유럽에서 신분이 다른 남녀 간의 사랑은, 그 자체로도 손가락질의 대상이었을 터인데 참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세월호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을 맞이하는 또 다른 4월에 발생한 ‘성완종사건’을 보면서 참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나라를 참으로 놀라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을 세계인들을 생각하면 공연히 부끄러워 낯이 화끈거린다.

소위 ‘성완종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하나같이 고인(故人)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불법 여부를 떠나, 물심양면으로 상당한 후원을 하고 지원을 주고받은 사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있어도,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아예 만난 사실조차도 잡아떼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통화내역 조회에 나타난 사실만 보더라도 ‘보통사이’가 아닌 것은 분명한 데, 이를 보면 마치 꿩이 머리를 바위틈에 들이 밀고 버둥거리며 잘 숨었다고 안도하는 모양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죽음 앞에서 겸허하고, 망망한 대우주로 떠나간 이를 추모하는 마음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사는가를 생각하면 참으로 허망한 일들이다.

150억년의 우주, 50억년의 지구에서 나서 채 100년도 못되는 생을 살다가는 우리네 인생살이에 무어 그리 미련과 두려움이 있다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는가!

더욱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지도급 인사 정도면 생사를 초월하는 진실을 무기로 삼아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싫으면 그런 자리에 올라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은 커다란 능력과 대단한 힘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뛰어넘는 진솔한 고백과 뉘우침이 있어야 감동과 화해가 가능하다. 자신의 삶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 어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진실이 최고의 무기다. ‘성완종 사태’를 보면서 왜 갑작스레 ‘마농레스코’가 떠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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