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일현 사진작가

산속 삶을 정리하고 도심으로 나오고서부터 삶이 나름 분주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가 울기도 전에 어둑신한 산협촌을 어슬렁거리며 소요하던 그 즐거움도 아마득한 옛 일이 되었는가 싶다. 기껏해야 퇴근 후에 무심천 둑방길을 거닐며 생선가시를 닮아 가시다리로도 불리우는 옛 풍물교를 바라보거나, 뱀처럼 휘어가는 무심천의 푸른 냇물을 바라보는 정도랄까.

느지막이 들어온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못다 푼 짐을 정리하면서 불현듯 시선을 사로잡는 강인한 끌림이 있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달랑 사진 기자재와 기껏 원고 뭉치뿐이다. 그리고 한 수레쯤 돼 보이는 책이랄까. 어느 누군들 이처럼 단출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마도 이는 홀로 사는 즐거움 일 터. 책은 대충 정리했고, 그간에 찍어둔 원고 뭉치만 박스에 담긴 채 널브러져 있었다. 박스 사이로 비죽 헤어 나온 그것은 다름 아닌 언제 적인지 가늠키 어려운 현장 사진이었다. 머리끈을 질끈 동여맨 그 사진은 해맑은 웃음을 흘리며 노동의 신성함을 외치고 있었다. 아니, 부르댄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조심스레 그 사진들을 하나하나 들춰 보았다. 80년대 이념 분쟁이 뜨거웠던 그 시절 아마도 노동의 당위와 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거리에 나왔을 터이다. 갓 유치원에 입학한 듯한 나이어린 아들딸을 옆에 끼고 아내인 듯한 중년의 여인과 함께 한 곳에 시선을 붙박고 환하게 웃는 터수로 봐선 시위대를 앞에 두고 문선대의 재미있는 활약이 있었으리라 싶다.

지방대 철학과에 늦깎이로 입학했다. 삼월의 강한 뙤약볕이 내리 쏘이는 교정 학생들은 앞으로 펼쳐질 가늠키 어려운 신입생으로서의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왠지 모를 불안이 표정 가득 도사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 웅성거림의 이면에는 푸른 싹을 내밀기도 전에 노란 잔디 위에 가득 분칠한 최류탄 분말과 시위대가 진압 경찰과 대항하기 위해 여기저기 뜯어놓은 보도블록 탓이리라.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하고, 플라톤의 이념을 사유하고,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가름하며 하이데거의 관념을 쫒기엔 이미 상아탑은 그 기능이 정지됐다고나 할까. 연일 이어지는 이념 논쟁과 시위에 찌들대로 찌든 학생들은 상아탑의 진리를 사유하고 인격을 갖춰나가기엔 어림없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어떻게 시위대에 맞서 싸우는가부터 지식인의 실천이란, 거의 맹목에 가까운 현장성만 팔팔한 청춘의 머릿속을 섣부르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난들 예외였을까. 강의는 아예 뒷전이고, 현장사진만 찍어대며 밤늦게까지 선술집에서 거의 괴성에 가까운 이념논쟁에 늦도록 휘둘리다 보면 새벽을 맞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헤어져 나온 그 사진을 펼쳐든 순간 잊힌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 시작했다. 박스를 여는 순간 매캐한 종이 냄새와 시쿰한 정착액이 마치 아련한 청춘의 그 시절 낭만을 부추겨 불러내고 있는 듯 하다.

그 시절에 불운이 상아탑만이었을까? 시내버스를 타도 내던진 짐짝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시민들, 왠지 퀭한 눈으로 시선을 두지 못하고 동공은 열려 있으되 무언가에 쫒기 듯 웃음기 없는 얼굴의 청년들. 차라리 민주와 정의를 외치는 선동가와 그 반대편의 최류탄 폭음만이 거침없는 삶의 활력을 뿜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 시대는 갔고, 한 움큼의 필름으로 남아 아득한 그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사진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 시선이 가 닿는 곳엔 엄혹했던 그 시절은 가고 없다. 하지만 역사는 늘 반복되며 그 시대상은 현존한다는 사실을 마치 입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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