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 이근규 제천시장

8남매의 장남으로 고학을 하던 고등학생 녀석은 마음이 힘들 때면 홍제동 화장터를 찾았다. 지금의 현대식과 달리, 당시 화로는 운모로 된 조그만 창이 있어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무심히 ‘타인’이 칠성판에 뉘인 채로 불구덩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광경을 보곤 했다. 숱한 사람들과 손길을 나누며,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속에서 한평생 울고 웃어온 육신이었고,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허우적거리며 꿋꿋이 살아온 이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혹은 어느 부귀공명에 겨운 집안의 호사스런 나날들의 끝이기도 하렸다.

소년의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불길이 솟아오르자, 드디어 화로 안은 온통 불바다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칠성판이 다 타고 나무에 붙은 불기운이 사그라질 즈음, 갑자기 누워있던 이가 벌떡 일어나 앉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들여다보던 녀석은 얼마나 놀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시 보니 뒤로 꽈당하고 들어눕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자주 만나 낯이 익어버린 학생을 향해, 화부아저씨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하셨다.

“놀라지 마라. 사람이나 오징어나 다 매한가지여. 뜨거운 불구덩에 들어가면 살이 타면서 오그라지게 되지. 오징어야 살뿐이니 이리저리 뒤틀리지만, 사람은 뼈가 있어서 저런 거여. 처음에는 뱃가죽이 오그라들어 벌떡 일어나 앉기도 하고, 어느 정도 타들어 가면 배가 뻥하고 터지며 다시 들어 눕게 되지. 그러다가 이리저리 뒤틀리기도 하면서 살은 다 타고, 불기운에 삭아버린 뼈와 이빨만 남게 되지. 그걸 공이로 갈아내면 한줌의 하이얀 가루만 남게 되는 거고…”

화장터의 사춘기 소년은, 온갖 갈등과 복잡한 심사가 다 가라앉았다. 오히려 득도한 도인의 가슴처럼 뭔가 뻥하니 뚫린듯하게 느낌까지 들었다.

망우리공동묘지도 소년에게 또 하나의 도량(道場)이었다. 그곳은 생(生)과 사(死)가 다르지 않고, 살아있는 자와 떠나가는 이의 그 절대 절명의 별리를 느끼게 하는 적막한 공간이다. 뉘엿뉘엿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해져 갈 때, 묘비명을 하나하나 읽어내려 가노라면 그 속에는 한 사람이 치열하게 살면서 절실하게 갈망했던 숱한 시간들이 살아있었다.

그렇게 주검의 세계를 맛보며 고통과 번민을 잊어가던 어느 날 한순간이었다. 아… 아무리 고통과 어려움이 짓눌러도 결국 생명이 붙어 있으니 그런 것마저 느끼고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 큰 축복이다.

갑작스레 우글우글 거리는 동생들의 꼬질꼬질한 모습들이 보고 싶어졌다. 오빠야 하며 달겨드는 아해들의 ‘발꼬락내’가 생각나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그랬다. 궁핍함도, 모자람도, 아픔까지도 모두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다시 중년을 넘어 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세상이 막막하고 온통 암울한 상황에 갇혀 절망스러울 때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주검의 세계를 떠올리며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150억년의 우주에서 50억년의 지구에서 만나 100년도 못되는 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살아 숨 쉬는 이들과 진실하게 기쁘고 반가이 손을 부여잡고 시린 가슴을 서로 나눌 수 있지 않은가. 세상에 죽음보다 더한 절망은 없고,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한 축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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