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순응하며 일궈온 '화합과 효행'의 고장

▲ 비봉면의 중심이자 효의 마을로 알려진 장재리-만가대마을의 이정표.

봉황이 날아올랐다는 비봉(飛鳳).
예전에는 청양읍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서상면(西上面)으로 불렸으나 1914년 군·면 폐합 당시 주위의 여러 마을을 병합하면서 비봉면으로 개칭됐다.

현재 비봉면은 10개 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운곡면이, 남으로는 청양읍이 위치하고 서·북쪽은 홍성군 장곡면과 예산군 광시면이 각각 닿아 있다.
이 같은 지리적 여건과 국도 29호선이 면 가운데를 관통하면서 비봉면은 오래 전부터 청양군과 내포지역의 타 시·군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해 왔다.

뿐만 아니라 비봉면은 본래 청양군내에서도 화합의 고을로 통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면민의 종(鍾).'
현재 비봉종각으로 불리는 이 종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인 1972년 마을의 화합과 면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집집마다 놋수저 한개씩을 모아 12관(48kg)의 크기로 만들었다.

이후 애향가인 이병록씨가 자비를 들여 차령산맥의 줄기인 비봉산 중턱 포란사에 종각을 세우고 매년 1월 1일 14회씩 타종해 왔다.
종 덕분인지 마을이 번창하자 올해는 3000여 주민과 출향 인사, 군의 보조금 7000만원을 들여 정자 및 종각을 다시 만들고 비봉면 복지회관으로 옮겼다.

종의 무게도 100관(375㎏)을 훌쩍 넘겨 기존의 것보다 10배 정도 커졌다. 면민들은 더욱 커진 종 만큼이나 면의 화합과 안녕이 지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봉면의 중심은 장재리다.
홍성을 지나 청양읍내로 들어서다 가장 먼저 만나는 이 마을은 본래 만가대로 불렸다.
장재울 또는 장재동으로도 칭해졌던 이 마을에 장자가 살아 장재리로 명명됐다는 속설(速說)도 전해지나 정확하지는 않다.

차라리 행정구역 폐합 당시 불노리(不老里), 만가리, 두여리와 대응군 이남면 가덕리 일부를 병합해 장재리라 칭하고 비봉면에 편입시켰다는 것이 기록상으로 더 정확하다.
기록으로야 어찌됐든 장재리, 만가대 마을은 비봉의 중심이자 효의 고장임이 틀림없다.

지난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을 뒤덮었던 초가지붕을 반듯한 양옥집이 대신하며 당시의 모습들이 이제는 기억 저편에만 남겨져 있지만 29호선 바로 옆에 서 있는 마을 입구표시는 비봉의 중심지임을 시위라도 하듯 문화마을의 자태를 한껏 뽐내며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또 임예걸·훤의 부자 정려를 비롯해 예닐곱개의 효행각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을 정도로 장재리는 조선시대부터 효의 근본마을로 알려져 왔다.
이 마을 앞으로 넓게 펼쳐진 '가남뜰' 역시 마을의 유례와 함께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옛날엔 수리시설이 돼 있지 않아 비가 내리면 온 가남들이 물에 잠겨 마치 바다와도 같았다. 때문인지 이곳에는 물빠진 바다를 연상하는 지명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

또 가남들은 무한천(無旱川)과 그의 지천(枝川)들이 종횡연합으로 만나면서 그 주변에 논밭이 생기고 마을이 생기면서 산간지대로 더욱 확장,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가남들을 둘러싼 주변의 산악지대와 거기에서 발원된 시냇물들이 제각기 지형을 달리하면서 길게 뻗은 무한천을 중심으로 중간지역에 큰 마을 12개가 생겨났다고 한다.

태고의 원시림 속에 이곳은 모든 것들이 풍성하며, 자연의 순수함이 있었다는데 요즈음에 와서 보니 또다시 풍만을 구가하며 자연의 순수함을 되찾아 가고 있음이 조금씩 눈에 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자연을 최대로 활용하며 살아왔던 옛 사람들처럼, 내일의 후손들도 자연과 더불어 풍요속에 더 잘 살아 갈 것이다.
주변을 포용하고 있는 넓디 넓은 가남들녘의 지평선이 저 멀리 황금빛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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