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연희 설치미술가

예술가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했다. 순교자, 혁명가, 천재, 샤먼 등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는 더 이상 찾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작가인 제프 쿤스나 데미안 허스트처럼 노골적인 자본가, 사업가, 쇼맨의 자질이 작가가 갖고 있어야 할 특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품 안에서 예술도 가격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감각이다. 예술작가들도 이제 예술성뿐만 아니라 기민한 경제 감각도 갖춰야 한다. 예술작품이 투기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조명받아야 할 작가들이 오히려 외면받기도 한다. 잘 파는 작가들이 잘 그리는 작가들보다 오래간다는 명제가 작가들에게 생존의 대전제로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술품의 값은 어떻게 매겨질까? 과학과 달리 어떤 기준을 정해서 정량화할 수 없는 것이 예술이다. 물론 다수가 선호하는 예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예술작품에 있어 객관적인 시각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술가치는 각자의 시선에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예술계도 이제 시장처럼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있다. 작가가 작품을 생산하면 화상은 그것을 시장에 내놓는다. 비평가가 작품의 가치를 책정하면 예술관은 작품의 고상함과 성스러움을 부여해주는 최적의 장소로 이용된다. 이 과정을 거쳐 수집가는 작품의 가치에 걸맞는 가격을 지급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다. 이제는 그 위에 자본의 논리가 더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갤러리스트인 조르쥬 필립 발루아는 "이 시대는 경매의 젖꼭지를 빨며 자란 작가들의 시대다. 단일시장화된 예술은 장소에 귀속되지도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다만 시공을 넘나드는 자본에 의해 발육이 결정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업성에 몰두한 예술품들이 많아지면서 상업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며, 비상업적으로 예술가의 의도를 표현한 작품만이 예술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나친 상업주의는 예술의 다양성을 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후원자와 의견이 맞지 않아서 작업을 망쳤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고, 아직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가치와 경제적인 가치는 함께 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회화나 연극이 돈을 벌어들인다고 해서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또 대중의 지지를 받거나 잘 팔리는 작품이 꼭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흔히 예술이 상업화됐다고 말할 때 그 상업화란 예술시장의 확장을 의미한다. 사실 '대중적'이라는 표현은 그것의 상품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아닌가.

대부분의 예술은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투자자가 없으면 작품 자체를 만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이 상업화를 버린다고 순수예술이 될까? 예술이 인간의 창조성을 이끌던 시대는 과거 역사의 한 국면이었을 뿐 이제 대중적인 시각적 오락으로서의 예술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수단이 아닌 예술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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