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갑도 전 충북도중앙도서관장

오랜만에 작두산 해발 378m 능선봉 팔각정자인 국태정(國泰亭)에 올랐다. 산경 전체가 한 눈 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대청호 푸른 물이 산 사이를 누비며 멀리 이어지고, 푸른빛 청송들이 군데군데 변함없이 푸르디 푸른빛을 자랑하고 있을 뿐 그 수많은 수목들이 대부분 옷을 벗고 나목으로 휑하니 서 있었다. 산 빛은 이미 가을빛이 아니었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알몸의 속살을 보이면서 겨울을 서두르는 처연한 몰락(沒落)의 가을이 거기 있었다.

오늘따라 산을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어 올라오는 동안 그 한적한 고요가 한껏 홀가분했다. 바람소리 산새소리 들으면서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산정(山情)을 느끼게 했다. 정적(靜寂)한 선미(禪味)속에 속기를 벗는 청정무구(淸靜無垢)를 즐겼다고 함이 옳을 것 같다. 너무나 조용해서 마음이 엄숙해지는 것 같았다. 겸손하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어느 현자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모든 걸 다 떨쳐버리고 잠드는 순리의 침묵! 홀가분한 고적이 산골짜기에 한껏 깔려 있었다.

이 처연한 몰락(沒落)의 가을 산경을 보면서 갑자기 요즘 언론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는 ‘독이 되는 부모’, 즉 부모의 지나친 과욕으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생명을 던지는 청소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생각남은 웬 일일까. OECD국가 중에 단연 1위를 차지한다는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의 사회 문제화! 순리를 역행한 부모들의 과욕 때문이리라. 심리 치료의로 유명한 미국의 수전 포워드는 그의 저서 ‘독이 되는 부모(Toxic Parent)’에서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주는 부모를 독이 되는 부모라고 정의했다. 나는 과연 어떤 부모였을까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했다.

마침 살랑대는 미풍 한 가닥 불어오고, 붉은 가을을 토해내던 단풍 한 잎 떨어지고 있었다. 소임을 다하고 떨어지는 단풍 한 잎, 자연의 오묘하고 신비한 생리 아닌가. 비바람 몰아치던 지난여름의 그 태풍에도 끄떡없던 그들이 저리도 부드러운 미풍 한 가닥에 떨어져 나가는 그 아름다운 생리를! 소명을 다한 후 자연의 신비를 받아들이고 저렇게 아름답게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꽃 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살기를 희망해 보지만…, 생자필멸(生者必滅)! 태어난 것들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게 순리 아닌가.

이제 우리 부모들은 제발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고, 자신이 못 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게 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하리라. 아이가 진정으로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을 밀어주는 보호자적 입장을 견지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부모와의 갈등에서 벗어나 우울과 스트레스를 모르게 잘 길러, 순리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여 즐겁게 소임을 다하고 순명에 따라 사라져가게 해야 함이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때 저 단풍잎처럼 아름다운 빛깔의 그리움을 품은 채 홀연히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순명을 다하고 떨어지는 낙엽 한 잎을 보면서 늦가을의 산이 주는 교훈 하나 깨달은 셈이다.

이제 하산을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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