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세평] 김지철 충남도교육감

교문을 들어설 때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소통 중 으뜸은 따뜻한 손 맞잡고, 눈빛을 나누는 것이라는 생각에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를 찾아 학생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곤 한다. 며칠 전 갈산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향토사와 전설을 연구하며 인문학에 조회가 깊은 교장선생님께서 책 내음 가득한 도서관으로 안내해 주셨다.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은 소과 초시에 응시해 장원을 했지만 이듬 해 복시에서 일부러 답안을 제출하지 않고 낙방했다. 이후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혔다. '서사예화'는 기본이고 천문지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두루 읽고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벗과 밤을 새워 토론하며 인문학의 폭과 깊이를 더했다. 마흔 살 무렵에는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는데 보수적인 사대부들과 달리 선입견을 버리고 청나라의 우수한 문화를 꼼꼼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열하일기다. 이렇듯 시대를 앞서간 연암의 폭넓은 지식과 사상은 과거 시험을 목표로 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경험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0세의 전업주부 박완서가 '나목'을 발표하면서 한국 모계문학의 수원지가 될 수 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또한 인문학의 힘이다. 박완서는 해방 직후 일본인이 버리고 간 톨스토이, 도스트옙스키와 같은 대문호의 책으로 지적 허기를 채웠다. 6.25 전쟁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8군의 초상부에 취직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 박수근 화백을 만나게 된다. 자연스럽게 인문학을 기반으로 통찰력을 키워온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 사이의 소통과 공감을 중히 여기는 학문이다. 마침내 40세에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깊이 있게 탐구하고 그려내는 작가로 우뚝 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한 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사가 가진 모든 기술을 내놓겠다."는 스티브 잡스는 또 어떤가? 잡스가 만든 스마트폰은 통신기기가 아니다. 사람들의 손에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쥐어준 것이다. 이런 그가 첨단기업을 이끌어가는 통찰력을 얻고 첨단기술과 감성을 융합해 사람을 매혹하는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낸 바탕은 인문학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인문과 경영, 제품과 감성,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강조했다.

그 동안 우리사회는 인문학의 필요성은 알지만 진학과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편견 때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올 봄 현대그룹의 입사시험에 '역사 속 발명품 중 공학도의 자질과 연관 있는 것을 선택해 그 이유를 쓰시오.'라는 에세이 문제가 출제됐다. 이는 잡스가 말한 것처럼 역사와 공학, 경영 전략까지 두루 알아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채용의 중심에 둔 것이다.

이제 인문학은 최대의 실용학문이다. 첨단기술이라는 지식은 불과 1년만 지나도 과거의 지식이 되고 만다. 반면, 인문학은 한번 체득해 평생 다른 학문과 융합, 새로운 지식으로 자가 발전하는 폭발적인 힘을 가진다. 하지만 인문학적 교양과 감성능력은 그동안의 공부 방식으로는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컴퓨터와 영어를 배웠던 것처럼 시험에 나올만한 것만 정리한 책이 출간되고 있다고 하니 걱정스럽기도 하다. 실용성을 논하기 전에, 인문학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충남교육청에서는 인문소양교육을 위해 교사 연수는 물론이고 인문학 강의가 가능한 인력풀을 구성하고 강의계획서를 수립하여 학교에 지원할 예정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푹 빠져 있는 머루알 같은 눈동자에서 박지원, 박완서, 스티브 잡스를 떠올려 본다. 교문을 나서는 가슴이 여전히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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