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천 배재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초록이 지쳐 단풍든다는 가을의 끝에 서 있다. 엊그제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까지 내렸다. 이렇듯 계절은 늘 내 발걸음보다 앞서 가곤 한다. 올해도 표표히 자신의 뒷모습을 남기고 떠나는 가을을 무심히 바라본다. 필자는 한 계절이 가고 또 한 계절이 오는 경계에 서서 지나간 시공(時空)을 떠올려 본다.

기실(其實) 사물의 의미는 실제 사물로 존재하는 지시물일 수도 있으며, 우리의 마음속에 형상화된 추상적 개념체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기억되는 청각 영상이고 후자의 경우는 심리적 영상이다. 그런데 필자가 엄혹했던 80년대에 만났던 '사평역'은 여전히 심리적 실재로 존재하며, 간이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물론 '사평역'은 시와 소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이지만 그 배경이 됐던 남평역은 세월의 바람이 몰고 온 낙엽을 따라 지금도 추억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 남평역의 노란 빛 수채화가 그리워 필자는 오래된 책장 속에서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전혀 화려할 것도 없는 이 시가 낙엽 지는 이맘때가 되면 아스라이 물안개 피어오르며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유는 질박한 삶을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슬프고도 소박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감동이 화려한 것이 아닌 진정한 것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를 통해 느끼는 것이지만 어둠이 내려앉는 가을밤이면 문득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연(事緣)은 이미 추억이 된지 오래고 사연(私緣)이 돼 얽히고 마침내 눈가에는 불빛처럼 빛나는 눈물이 맴돌 때가 있다.

시는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는 구절로 시작 된다. 그런데 막차는 그 이름이 갖는 '마지막'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유쾌하거나 화려할 수 없는데, 그 막차가 오지 않기에 기다림에 단련된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희망이 현실화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등장하는 객관적 오브제인 '톱밥난로'는 지나간 시절 시골 간이역의 슬프고도 정겨운 소품이면서 이 세상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며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들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따뜻한 정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사색(思索)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사색(死色)이 되고, 인간 문화를 지배했던 문자 기록의 권위와 구비 전승의 전통마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인터넷 검색이 요란을 떨고 첨단의 기술이 펼쳐주는 테크노피아의 슬픈 그림자 뒤에서 순간 명멸하는 커서(cursor)의 깜빡거림을 따라가는 시대의 자화상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루카치가 고백했듯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행복과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얼마나 황홀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아! 늦가을 햇살에 고개를 들어 멀어져 가는 가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필자의 낡은 책장에서 꺼내 든 시집에서 만난 '사평역'을 통해 역(驛)은 바로 여기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문득, 내 마음 속 간이역이 짙은 가을만큼이나 사무치도록 그립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