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당] 류용환 대전시립박물관장
반면 사진이 없던 조선시대 초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조선시대에 그려졌던 초상화 제작의 원칙은 모델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에 있었다.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 해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이라 여긴 것이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은 끝까지 자신의 초상화 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춘당집’에 의하면 제자들이 회화에 필요한 도구를 갖춰 놓고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전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생은 “털끝만큼이라도 닮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후세에 전할 실제는 이 초상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상화가 반드시 얼굴 모양을 정확히 닮게 그리는 데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그리는 데도 얼굴 겉모습은 칠분모(七分模, 70%만 닮음)면 족하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지만, 그보다 대상 인물이 지닌 정신과 성격을 표현해 내는 것을 더 높이 샀다. 이것이 바로 '전신사조(傳神寫照)' 정신이다.
'전신사조'는 중국 육조 시대의 화가 고개지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사조'란 작가가 바라보고 관찰한 대상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을 뜻하고, '전신'이란 그 대상의 내부에 들어 있는 정신과 성격을 그려낸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대상의 겉모습을 묘사하되 그 속에 숨어 있는 정신까지를 표현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신'은 형태가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형태가 있는 겉모습을 통해야만 드러낼 수 있다. 그렇기에 전신 없는 사조 없으며 사조 없는 전신도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신사조 정신은 초상화 제작 과정에서 치밀한 관찰로 구현되기에, 화가는 먼저 대상이 되는 인물을 치밀하게 관찰해야 했다. 이 때 대상이 일반 사대부이거나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일이 비교적 쉬웠지만 어진일 경우에는 관찰이 여의치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왕의 초상화는 '어진도사도감'이라는 관청에서 화원이 그렸는데, 그 종류에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 세 가지가 있었다. 도사란 생전의 왕의 모습을 보고 그리는 것이고, 추사는 왕이 죽은 뒤 추정에 의해 그리는 것이며, 모사란 그려진 초상이 훼손된 경우 원본을 바탕으로 새로 그려낸 것이다. 도사의 경우 왕을 직접 보고 그려야 했으나, 워낙 지엄한 존재라 수월치 않았기에 왕을 닮은 사람을 수없이 그려 미리 연습을 한 후에 그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관찰을 중시해 대상의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과 특징까지 드러내고자 했다. 얼굴에 있는 작은 주름 하나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그리면서 대상의 진면목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에 그치지 않고 대상 인물과 동일시되는 사물로 인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