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 김재학 LX대한지적공사 대전충남본부장

오늘은 가을의 막바지라 할 수 있는 ‘상강(霜降)’이다. 이는 24절기 중 18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로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인 ‘한로(寒露)’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사이에 위치한다. 옛 어른들은 한 해 김장김치의 맛이 상강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서리를 맞은 배추와 무는 수분이 많아져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아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이야기라고 하니 우리 조상들의 미각과 지혜가 놀랍다. 또 온 산천의 단풍미가 최고조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은 국화전을 안주로 국화주와 함께 풍류를 맘껏 즐겼다고 하니 가히 이 절기는 한 해 농사를 천천히 마무리하던 평온한 가을의 끝자락 이었으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올 가을은 이런 일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계절로 기억될 듯하다.

얼마 전 필자는 한 기고문에서 영국의 시인 토머스 엘리엇의 연작시인 ‘황무지’의 글귀를 인용해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온갖 꽃과 나무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을 모든 생명체가 버거운 삶으로 돌아와야 하는 고뇌로 묘사하며 망각의 눈이 쌓인 겨울을 차라리 평화로웠다고 표현했듯, 꽉 막히고 답답한 교실에서의 시간이 그들에겐 오히려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적은 바 있다. 그러나 이후 아쉽게도 가족의 달인 5월과 나라사랑의 달인 6월에도 이렇듯 잔인한 사건과 사고는 멈추지 않고 반복됐다. 사실 이 모든 참사는 다름 아닌 안전 불감증이 원인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지난 2월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사고는 지붕 패널을 고정하고 있는 금속 구조물을 제대로 조립하지 않은 부실시공이 사고의 원인이었고, 4월 세월호 참사는 무심코 넘겼던 수백 가지 불안전 요인과 함께 국가재난대응시스템의 부실이 원인이었다. 5월 고양터미널 화재사건은 안전수칙을 무시한 무리한 작업이, 같은 달 장성 요양병원 화재는 허술한 안전점검과 환자관리가 피해의 규모를 키웠으며, 6월 군 총기난사 사건은 각종 안전의식 부재의 결정판이었다.

이번 판교공연장 참사 역시 무너진 안전의식과 안전 불감증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환풍구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높게 설치되었더라도, 주위에 안전요원이 한두 명만 있었더라도, 이도 저도 아니면 환풍구 철제 빔이 한두 개만 더 시공됐더라면 이번 사고는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다. 사고 직전 사회자의 반복된 경고를 무시해 사고의 피해정도가 이토록 커졌다니 더욱 가슴 아프다.

특히 이번 사고가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첨단지구에서 그것도 한류 걸그룹 스타의 화려한 공연이 진행되는 와중에 발생한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른바 문화생활을 즐기는 행복한 일상의 한 가운데서 이처럼 후진적인 사고가 버젓이 발생했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성과를 이룩한 우리사회가 시민의 안전의식이 이처럼 낙제점에 가깝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안전 불감증 퇴치를 위한 관련부처의 단호한 노력과 함께 기초적인 질서부터 지키려는 안전의식과 선진적인 교양을 국민들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반복되는 잔인한 계절을 벗어나 자유롭게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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