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당]
이용관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굳이 독서광이 아니었더라도 어릴 적에 H. G. 웰스의 소설 ‘투명인간’을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거나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처럼 비참하게만 되지 않는다면 '투명인간'이 되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괴롭히는 나쁜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줘도 아무 탈이 없을 테고, 좋아하는 이성 친구의 일거수일투족을 들키지 않고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상은 오직 나에게만 현실이 돼야 하고, 또 언제든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누구나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소설 속 주인공에게처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테니까.

대전예술의전당이 실력 있는 젊은 연출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서울문화재단 산하 남산예술센터와 손잡고 공동 제작한 ‘투명인간’이 다가오는 24~25일 앙상블홀 무대에 오른다. 손홍규의 단편소설을 강량원이 새로운 연극 언어로 각색·연출한 작품으로, 투명인간 놀이를 하다가 진짜 비극적인 투명인간이 된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굳이 상상을 하지 않아도, 소통이 부족한 현대를 사는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존재감 없는 투명인간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갈수록 심각해지는 건 아닐까? 이 시대의 신선한 연출가 강량원이 빚어내는 또 하나의 ‘투명인간’을 보면서 이를 확인해보시라. 그래서 자신만이라도 얼른 진정한 소통의 존재로 돌아갈 단서를 발견하시기 바란다.

한국에서는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현대무용과 연극은 관객기반이 더 취약하다. 흔히 우리는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진지한 장르라서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시장 자체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연극인들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하기도하다. 연극인들의 궁핍을 말해주는, 필자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 서울 어느 큰 공연장의 연간 공연 평가를 주관할 때다. 음악이나 무용 분야의 평가위원들은 평가비가 적다고 불만이었는데 연극 쪽은 가끔 이렇게 묻는 평가자들이 있었다. “어, 돈도 주나요?”

그렇지만 연극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유케 하는 깊이가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나 부조리를 건드리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해독능력(literacy) 또한 연극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가을에 특히 연극과 친해질 것을 권해보고 싶은 것은 그만큼 애써 준비한 좋은 연극공연에 관객이 하도 없어서다. 대전예당에도 준비된 좋은 연극이 여럿 있지만, 마침 지난 15일부터 원도심에서는 '국제소극장연극축제'가 열리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가난한 연극인들도 격려할 겸, 깊어가는 가을밤을 원도심에서 보내는 것도 후회 없는 선택이 되리라 믿는다. 전통 있는 맛집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연극을 본 다음엔 서로의 감상을 나누면서 소주잔이라도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무명의 투명인간에서 존재감 있는 소통의 나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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