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유제봉 국제로타리 3680지구 2005-06 총재

속담에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줄 것이 없다’라고 했다. 부(富)는 모으면 모을수록 더욱 키워가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모으는 쪽은 적극적이지만 베푸는 쪽엔 인색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굵직한 재벌들이 존재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적 환원 차원에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될만한 기부행위를 한 사례는 많지 않다.

그저 일구어놓은 기업을 자기 후손에게 물려주는 고작 세습차원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오히려 수백억원 대의 기부행위를 실천한 쪽은 재벌이 아닌 서민층에 있었다.

선진국 미국의 예를 보자. 포브스 선정 세계 23위에 오른 찰스 피니의 경우다. 그는 "돈은 매력적이지만 아무리 많아도 두 켤레 신발을 한꺼번에 신을 수 없다"라고 말해 더욱 유명해졌다.

최근 미국의 한 언론인이 피니의 삶을 다룬 책 '억만장자가 아니었던 억만장자'를 펴내면서 그의 '베푸는 삶'이 미국인에게 감동을 주고 있어서다.

피니는 1931년 뉴저지주의 아일랜드 이민자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는 남에게 잘 베풀며 살았으나 가난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까지 참전했으며, 제대한 뒤 코넬대학에서 호텔경영을 공부했다. 학교를 마치고 선원들에게 주류를 파는 사업을 시작한 그는 호텔에서 일하던 대학 동창 로버트 밀러와 함께 면세점 사업을 해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피니는 집도 자동차도 없이 수십 년간 나눔의 삶을 살아갔다. 1988년엔 13억 달러의 재산으로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 부자 명단에 올랐다.

그는 명단과 함께 실린 이런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부호 명단에서 빠지고 싶다면 돈을 잃거나, 남에게 줘버리거나, 죽는 방법밖에 없다’라는 내용이다.

그는 변호사에게 이런 쪽지를 건넸다. "첫째 경우는 생길 것 같지 않고, 셋째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둘째만 남는다." 이 둘째 방법을 실천에 옮긴이가 세계적 면세점 체인업(DFS)의 공동 창립자인 당시 76세의 찰스 피니 씨다.

그는 지금까지 26억 달러를 학교와 병원에 기부하는 등 무려 4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자선재단에 내놓았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본인 명의의 부동산은 물론, 승용차도 없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며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팔뚝에는 15달러(약 1만 5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식사는 뉴욕의 허름한 식당에서 해결한다. 비행기도 서민들이나 이용하는 이코노미 클래스만 탄다.

피니가 1982년에 보유 주식의 일부를 그가 남몰래 세운 애틀랜틱 자선재단에 넘겼다. 1996년 프랑스 기업(LVMH)에 면세점을 매각하고, 본격적인 자선활동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피니의 자선활동은 시작한 지 15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모두 6억 달러를 자선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해 '얼굴 없는 천사'로만 알려졌지만, 면세점 체인을 인수한 업체 관계자가 회계장부에서 엄청난 액수의 기부금 내역을 발견하고 언론에 제보한 것이다.

그는 당시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게 필요한 것보다 많은 돈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기부 이유를 밝힌다. 피니의 기부행위는 사후 기부가 대세이던 미국 사회에 '살아 있는 동안 기부하기'의 모델을 제시해 빌 게이츠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피니는 자신의 검소한 생활과 관련, "15달러짜리 시계도 잘 가는데 왜 비싼 게 필요한가?"라며 "호화 저택이나 고급승용차 캐딜락은 나의 체질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전설적 자선사업가인 앤드루 카네기가 했던 ‘부유한 죽음은 불명예스럽다’라는 말을 늘 새긴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부문화가 아직은 보편화 되지 못하고 미흡하다는 점에서 모두가 한번 쯤 깊이 새겨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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