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김필권 국민건강보험공단 대전지역본부장

추석 연휴를 보내고 사무실에 돌아왔더니, 한 부하 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아 그 이유를 물어봤다.

가족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보험사에서는 사고 이후 심장마비가 직접적인 사인이라며 보험금을 지급할 사유가 아니라고 지급을 거절했단다. 이 소문을 듣고 주변의 변호사 사무실 몇 곳에서 "만약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승소할 확률이 크다"며 제안을 해 왔단다.

그는 만약 소송을 하게 되면 보험사가 대형 로펌의 변호인단을 선임해 달려들 게 분명하고, 지기라도 한다면 거액의 소송비용을 부담해야 하니 엄두가 안 난다며 소송을 포기했단다.

그동안 담배회사가 흡연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이 보험사와 비슷했다. 미국에서 다국적 담배회사들은 1992년까지 800건의 개인 담배소송에서 승리했고, KT&G 또한 개인 소송에서 진 적이 없다. 이들에 대항할 능력이 없어서 제소조차 할 수 없었던 피해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의료비를 지출하던 미국 주정부가 소송전에 나서면서 판도가 바뀌어 이들 담배회사들은 약 260조원의 합의금을 물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4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내외 담배회사들에게 소송을 제기해 지난 12일 첫 변론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소수의 개인들이 제기했던 담배소송이 있긴 했지만 이제야 말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는 공공 기관에서 제기한 역사적인 진짜 담배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이날 변론에서 담배회사 측 변호인단은 본질적인 내용보다는 공단에게 소송 자격이 없다는 소송상의 절차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공단의 진료비 지출은 간접 손해이기 때문에 당사자적격이 없어 직접 청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미 우리 대법원은 '생동성시험조작 소송'이나 '원외처방약제비환수소송' 등에서 공단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바 있으므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담배회사들은 개인 담배소송의 4월 대법원 판결을 들어, 이번 소송의 쟁점인 담배의 결함 여부와 담배회사의 불법행위 책임에 대해서는 이미 대법원에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결은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거나, 국민정서 및 시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당시 판결은 담배회사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들을 제출하지 않아 제한적 자료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번 소송의 경우에는 공단이 보유한 대규모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흡연과 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고, 새로운 연구자료와 해외 전문가들의 지원도 확보돼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될 것이다.

게다가 공단은 지난 개인소송에서 고등법원도 흡연으로 인해 초래된 것으로 인정한 소세포암과 편평세포암에 기초해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승소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미 세계보건기구와 미국 보건부, 국제암연구소가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인정하고 담배회사들의 정교한 기만행위를 경고한 바 있다.

보건복지부도 최근 담배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해 담배의 위험성을 인정하고 있다. 공신력 있는 국내외 기관들이 잇따라 담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담배회사들의 주장대로 담배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면 이들은 왜 미국에서 내려진 거액의 배상판결에는 불복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담배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담배와 다르단 말인가? 담배회사들이 떳떳하다면, 이참에 담배의 제조과정과 첨가물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해 보여야 할 것이다.

담배는 더 이상 기호품이 아니다. 69개의 발암물질과 4,800여종의 화학물질이 들어있는, 마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한 물질일 뿐이다. 이번 건보공단의 담배소송을 통해 담배의 위해성에 대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우리의 건강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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