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글밭] 존 엔디컷 우송대학교 총장

한국의 추석이 지났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율이 부쩍 높아진다는 기사를 보았다. 가족끼리 모여 따뜻하고 즐겁게 보내야할 명절이 갈등과 미움이 시간이 된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에게 매년 8월은 가족과 함께 하는 달이다. 열흘 정도의 휴가를 내서 집이 있는 애틀란타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와 딸의 생일, 그리고 필자의 결혼기념일, 손자의 지난 생일을 한꺼번에 축하한다.

올해로 결혼한 지 꼭 55년이 된 필자는 가족들과 지내며 지난 결혼 생활을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올렸다. 55년 전, 일본 도쿄의 한 구청에서 아내 미츠요와 결혼식을 올리던 그 때 창밖에는 매미가 우렁차게도 울었다.

일본 관공서에서 발급받은 혼인 신고서를 미국대사관에 가서 신고하면서 비로소 우리의 결혼이 성립됐다. 지금이야 국제결혼이 흔하지만 1959년이던 당시, 우리의 결혼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약 절반 정도의 주에서는 다른 인종과의 결혼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 폐지가 실시된 지 백년이 다 돼갈 즈음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노예제도가 정당하다고 여겼으며 그로 인해 구시대의 법령은 사라지지 않았고 인종 차별은 여전했다.

필자의 고향인 오하이오주는 다행히 그런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의 결혼이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뜻한 바를 이루었다.

공군으로 재직한 28년, 공군에서 예편한 지 28년의 시간이 지났다. 국경을 넘어 결혼한 우리의 생활이 편안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세계 정세와 관계가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은 중국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 베트남 호치민이 기존 체제에 반발해 온 아시아가 들끓을 무렵이었다.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서로 차 트렁크 속에 비상사태에 대비할 장비를 챙겨주는 것으로 서로의 안전을 빌며 결혼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군인이라는 신분 특성상 전쟁이라도 난다면 아침 출근길에 잘 다녀오라는 인사로 집을 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몇 주가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군인이 그런 불안한 일상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나날이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우리 부부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그 시절을 견디지 않았나 싶다.

때론 힘겹게 때론 즐겁게, 많은 이야기와 사연으로 무사히 지내온 55년의 세월. 올해로 54세가 된 딸과 50세가 된 아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손자들의 재잘거림을 지켜보면서 필자 부부의 결혼 여정이 새삼 감사하게 다가왔다.

이번 추석 명절에 모여 전을 부치고 송편을 만드는 자식들을 보면서 필자처럼 일흔을 넘긴 부모들은 이런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같이 부대끼는 시간이 많은 만큼 가장 상처를 주는 존재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도 가족 앞에서는 더 못하겠다고 고백한 지인도 있었다. 그래서 가족 간에 한 번 생긴 골이 더 깊어지기도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주는 것도 가족이다.

건강하게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운 것도, 상처에 가장 큰 위로를 주는 것도 가족이었다. 추석 명절이 지난 추억을 꺼내보고 그 추억에 함께 웃으며 또 하나의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에 남기를 바란다. 한국인에게 가족과 친지가 함께 보내는 명절이 있는 것은 축복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불행한 집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행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사랑이라는 한 가지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 사랑으로 보듬어 보면 가족이 가장 큰 힘이다. 명절이 지나간 지금, 부모님에게 혹은 자식에게 혹은 아내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어떨까.

"그 동안 고생했습니다. 사랑합니다."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두 팔을 뻗어 포옹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사랑이 가득찰 것 같은 계절,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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