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송기은 삼성화재보험 RC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께서 우리나라를 찾아오신 닷새동안 만큼은 우리 모두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세월호도, 강정 마을도, 저 간악한 일본군의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도, 밀양과 청도 송전탑도 오직 프란치스코를 통해 위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는 이 사회, 이 나라가 얼마나 취약하고 무책임한 집단인지를 눈으로 확인한 일대 사건(?)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빈자의 성인답게 파격적인 행보와 낮은데로 임하라는 가르침에 충실해 소외당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해맑은 미소로 그들의 손을 잡아줬으며, 특히 천사같은 어린 아기들을 빼놓지 않고 챙기셨다.

곡기를 끊고 단식을 감행한다는 것은 곧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종교적 목적의 금식이나 건강 챙기기 목적의 다이어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방식으로써의 단식은 자신을 저 밑바닥까지 낮추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어 세상에 두루 알리고자 함이다.

과거 독재 권력 시대의 분신이나 투신에 비해 훨씬 완곡하면서도 끈기있는 싸움의 한 형태이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소통을 원하는 합리주의자들이다.

하기에 이런 단식에 백안시하거나 도외시하는 세력들은 세월호 사건이 ‘바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였다’느니, ‘국회에 찾아온 세월호 유족들을 보면 5·16 쿠데타 때 민간단체의 국회 난입을 상기시킨다’는 망발을 한 청주 지역구 국회의원도 있다. 이런 자들이 국민의 아픔을 알고 달래주기는 커녕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형국이다.

대통령의 자리는 어떨까. 온 국민을 대통합시키라는 유권자의 준엄한 명령을 받은 두령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국민을 섬기기는 커녕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가르고,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힘없는 자를 억누르고 그들의 피맺힌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를 지도자라 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낙관주의자들은 역사는 점진적으로 진보한다는 믿음아래 작금의 이러한 온갖 질곡은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한 시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곧 창조적 소수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의식이 깨인 시민 집단이 지배적 소수자를 극복한다. 2%의 부족분을 뛰어넘기 위한 담금질의 과정이 있어야 무른 쇠가 더욱 단단해진다는 논리다.

초·중·고 설문조사에서 ‘우리 민족이 통일을 해야만 한다’는 응답률이 53%에 불과했다는 소식이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 절대 다수의 반대에도 강행한 4대강 사업이 삽질이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모든 문제는 세월호에 집약돼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한 정부, 국민의 절규에도 아랑곳없이 소통을 거부하는 정부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조선 정조대왕은 100여m에 달하는 만인소를 몸소 훓어보시고 눈물을 흘렸다하지 않는가? 오늘 이 민주주의라는 명목이 과연 민본주의라는 애민 정신의 왕조의 덕치보다 더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민 아빠의 단식에 동조하는 2만 4000여명에 이어 온 국민이 릴레이 단식에 돌입해야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까. 가슴 속 깊이 파고든 이 치명적인 내상은 누가 치유한단 말인가.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를 또 모셔와 우리나라에서 함께 살아야만 치유가 가능할까? 이제 무능한 정치권을 심판하고 국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깨어나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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