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 칼럼]
맹수석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장

한 장의 사진이 감동을 주고 있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빨면서 천진난만하게 주변에 정신이 팔려 있는 아기와 그 아기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물리고는 인자하면서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노인! 최근 방한했던 교황이 보육시설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이다.

교황의 방한이 남겨준 감동과 함께 우리 사회에 잔잔한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것 같다. '낮은 데로 임하는 자세'에 대해 돌이켜 보는 사람들이 주변에 늘었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감상일까? 교황은 방한기간 내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낮은 곳으로 임하는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 카퍼레이드 도중에 세월호 유가족 앞에 다가선 것도 소수자의 목소리를 더 가까운 곳에서 듣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창졸간에 우연히 일어난 '해상 교통사고'가 아니다. 이는 종교의 탈을 쓴 기업의 탐욕과 국가의 무기력한 대응책이 빚은 총체적 부실로 인한 참사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 학생들을 가득 태운 채 침몰했던 세월호에, 그리고 부조리와 무기력으로 서서히 침몰해가는 '대한민국호'에 온 국민은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른바 '세월호특별법'의 처리를 앞에 두고 정국파행이 몇 달째 계속되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처참하게 희생되었을 때, 정치권은 이구동성으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외쳐댔다. 그 후 4개월이 지날 때까지 어떠한 조치도 제대로 취해진 것이 없는데도, 정치권은 이를 벌써 망각했단 말인가? 경제침체와 민생법안의 표류라는 구실을 내세워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슬며시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환부를 도려내지 않은 채, 일단 겉으로 드러난 상처에 1회용 밴드를 붙이고 상처 주위를 소독하는 제스처는 국민을 절망하게 한다.

이해관계의 대립이 첨예해지고 어쩔 수 없이 치명적 손해를 입는 측이 생길 때, 사람들은 흔히 양보와 타협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용서와 화해를 권유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전제는 명명백백한 진실의 규명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엇을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의 진실 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어떤 해법이나 용서도 있을 수 없다. 진도 앞 바다의 그 차가운 물 속에 어린 영혼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과 온 국민의 마음도 영원히 잠겨 있게 될 것이다.

정치권은 더 이상의 '폭탄 돌리기'를 중단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청와대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가 국민의 답답함을 풀어주고, 아픔을 치유해 주어야 한다. 그 '해법'은 간단하다. 정치권이, 청와대가 오로지 세월호 유족의 처지, 나아가 국민의 입장에 서보면 된다. 맹자(孟子)가 주장했던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은 '상대방의 처지나 경우를 서로 바꾸어 놓으면 그 하는 것이 서로 다 같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도 결국 맹자의 역지사지의 지혜와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 서로를 이해하고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이제 낮은 곳을 바라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일 때가 되었다. 그리고 과감히 손을 내밀지 않으면 함께 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