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 ?
?

▶물살이 흡사 짐승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명량(鳴梁)이다. 성난 바다가 휘몰아치니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명량은 공포의 대척점이자, 백성 눈물의 발원지다. 명량에 피바람이 불기 두 달 전, 원균은 칠천량에서 200척의 배를 잃었다. 때문에 왜(倭)의 바다는 패배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바다는 두렵고 또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도져 수군을 맹물로 만들었다. 이순신은 간구(懇求)했다. 꿈에서 영의정 유성룡과 이야기하며, 서로 속 아랫도리를 끄르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나라를 걱정했다. 벼린 새벽, 허한(虛汗)이 무시로 흘러 옷이 젖을 만큼 처절한 사유였다. 이순신은 꿈에서도 울었다.

▶후궁 서자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숱한 당쟁과 전쟁의 진앙서 떨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의 근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592년(조선건국 200년 되던 해), 왜란이 터지자 그는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몽진(피난)을 떠났다. 심지어 한양과 개성, 평양이 함락되자 요동 망명까지 계획했다. 그는 생각의 불구였고 겁쟁이였다. 1597년 10월 25일, 울돌목에 푸른 회오리가 쳤다. 이순신의 13척과 일본 수군 133척이 만난 것이다.(13과 133의 숫자는 난중일기와 장계(狀啓)의 기록이며 줄행랑 친 200척의 왜선을 포함하면 333척임). 명량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됐다. 왜군 1만 2000명이 수장됐고 우린 2명을 잃었다.

▶무(武)를 경멸한 시대, 이순신은 충(忠)을 말했고 충(忠)은 백성을 향했다. 그는 모함으로 세 번이나 파직당하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또한 그는 단호하고 엄격했다. 군관과 색리(色吏)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곤장을 때렸고, 매양 거짓말을 일삼는 자는 목을 베어 효시했다. 결국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기에 23전 23승이 가능했던 것이다. 칼을 베고 쓴 '난중일기'는 혼자만의 기록이다. 후세에 남기려고 쓰지 않았다. 당시 쓰지 않고는 못 견디었기에 핏빛 사초(史草)가 됐을 뿐이다. 사즉생, 칼의 노래는 처절한 연민의 노래다.

▶지금 대한민국엔 이순신의 칼에 효시 당할 군졸들이 들끓는다. 군대는 양아치집단이 돼가고 있다. 어떤 병사는 아군을 사냥했고, 어떤 병사는 아군에게 사냥 당했으며, 어떤 병사는 스스로를 사냥했다. 장수는 군졸의 주검에 대해 말이 없고, 군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 누가 충(忠)을 이야기하는가. 그 누가 이 잔혹한 ‘주검의 노래’를 끝낼 것인가. 명량의 충(忠)은 회오리바다에 우두커니 서서 조선(朝鮮)의 풍전등화를 바라본다. 아, 바보들이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