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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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문자(文字)보다 빨랐다. 먹는 것은 언어보다 빨랐다. 인류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쪽원숭이)는 활엽수림이 줄어들고 지구대가 건조해지기 시작한 600만년 전, 나무에서 내려왔다. 나무에 매달려 네 발로 기던 원숭이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진화였다. 앞다리를 들어 직립보행을 하니 사냥이 수월해졌다. 또한 두 발로 걸으니 두 손이 남았다. 그 두 손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획기적인 일인가. 하지만 아무리 진화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해도 두개(頭蓋)용량이 현생인류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고릴라였을 뿐이다.

▶호모하빌리스(손쓴 사람)에 이어 탄생한 호모에렉투스(곧선사람)는 꼿꼿하게 서서 다녔고 ‘불’을 만들어 썼다. 꼿꼿하게 선다는 건 멀리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뇌의 용량이 커져 도구를 사용한 호모사피엔스(슬기 있는 사람)는 점차 뛰기 시작했다. ‘걷기’에서 ‘뛰기’로 업그레이드하자 사냥감이 늘었고 진화의 속도 또한 빨라졌다. 현대인의 외모와 지능을 거의 갖춘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슬기+슬기 사람)는 속도를 조절하며 달렸다. ‘걷기’는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뛰기’ 위한 엔진으로 DNA를 바꾼 것이다.

▶유병언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작다. 네 발로 나무에서 내려와 살았지만, 두 발로 사라졌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머리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호모에렉투스처럼 도망 다니고 있다. 꼿꼿하게 서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피신 중이니 ‘두 발’이 아니라 ‘네 발’이다. 그는 세월호의 뒤켠에서 홀로 숨어 걷다가 뛰고, 뛰다가 기고, 기다가 걷고 있을 것이다. 반면 그가 기고 걷고 뛰고 있을 때 대한민국은 모멸감을 느끼고 있다. 두 발로 걷고 있는데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어쩌면 네 발로 나무 위에서 세상을 조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원한 도망자는 없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나무에서 도망쳐 사바나의 기름진 열매를 얻었지만 맹수의 사냥감에선 해방될 수 없었다. 컴컴한 어둠은 절망이다. 컴컴한 바다 속도 절망이다. 누구의 절망이 더 시리고 푸른가.

▶그는 화석이 되기 전에 출토돼야 한다. 생물학상 호모(homo)라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어느 골짝에서, 혹은 이빨 빠진 강가에서, 나무와 뼈가 침전된 삼각주 지층에서, 아니면 어느 사바나지역에서 태연하게 사냥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 줄행랑은 미개한 유인원의 짓이다. 아직까지 그에겐 직립보행의 권리가 없다. 그렇다고 뛸 권리도 없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가면을 벗고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회귀하라.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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