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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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와 육당 최남선은 절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최남선이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자 정인보는 상복을 차려입고 육당의 집을 찾아가 '내 친구 육당이 죽었다'며 통곡했다. 정부수립 후 최남선이 반민특위에 걸리자 정인보는 증인으로 나서 육당을 변호했다. 그러나 그가 석방되자 죽을 때까지 상종하지 않았다.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의리'때문에 굶어죽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한 날 한 시에 죽게 해 달라'고 맹세한 유비·관우·장비의 의리는 혼백의 결합이다.

▶한국사회에서 의리는 혈연·학연·지연 때문에 생긴다.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의식이다. 그래서 '끼리끼리'가 아니라 '형님·동생'이다. 처음 만났는데 이모, 어머니라고 넉살좋게 부르는 것도 의리의 변형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의리는 깡패들의 전유물로 둔갑했다. 옳든 그르든 내가 네 체면을 세워줄 테니, 너도 내 체면을 세워달라는 것이 패거리 문화의 의리다. 오야붕은 꼬붕의 가오(허세)를 세워주고, 꼬붕은 오야붕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의리도 없고, 주먹도 못 쓰면서 서민들에게 '삥'이나 뜯는 양아치다. 약자에게 강하고 자기편만 감싸니 야쿠자 의리다. 등짝에 용문신(文身)을 했지만 구렁이처럼 보이고, 호랑이를 그렸으나 고양이처럼 보이는 것은 허세다. 그들이 정녕 '나를 밟고 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단어가 바로 '으~리'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한 김보성은 25년 동안 한결같이 '의리'만 외쳤다. 어쩌면 그 허세가 무명(無名)기간을 더 늘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의리'라고 주장해온 그에게 국민들이 으리으리한 '의리'로 화답 중이다. 반면, 축구계 큰형님으로 불리던 홍명보 감독은 의리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오랜 시간 빌빌거리며 벤치나 지키던 박주영을 감싸 안고 의리축구를 하다가 망신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일명 '오냐오냐' 축구다. 우리 속담에 '사람을 보려면 그 후반전을 보라'고 했다. 잘나가든, 못나가든 의리 있게 살자.

▶같이 싸워주고 함께 맞아주는 게 의리인가. 아니면 돈을 떼여도 욕 안하는 게 의리인가. 어떤 상황에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줘야 한다는 '의리'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관피아(관료 마피아), 정피아(정치인), 모피아(재무부+마피아), 해피아(해경 마피아), 금피아(금융 마피아), 산피아(산업통상), 국피아(국토교통부), 교피아(교육)….

피차 아는 사이라고 서로 뒷배를 봐주는 건 의리가 아니다. 이건 자리를 내주고 삥을 뜯는 양아치 짓이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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