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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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한 유곽에 들러 신고식을 치르고, 개처럼 끌려간 곳은 지옥이었다. “빨리 먹어, 빨리 입어, 빨리 뛰어. 빨리 싸. 빨리, 빨리, 빨리…. 박아, 뻗어, 기어, 벌려….” 문명사회의 짤막한 문맹어(文盲語)는 비겁했고 야비했다. 회식시켜준 뒤 지랄했고 칭찬한 뒤 빠따를 때렸다. 군복은 마치 핏기 없는 수의처럼 눈물에 젖고 또 젖었다. 하얀 밥 먹고 국방색 배설을 하고 검게 생각하는 군상들. 봄여름가을겨울, 다시 봄여름가을겨울…. 갇힌 젊은 날, 그 3년을 살면서 입에선 비루먹을 ‘軍소리’만 나왔다. 물론 옛날 얘기다.

▶군대는 기댈 곳만 있으면 잠이 쏟아지는 곳이다. 그런데 불면을 앓고 있었으니 밤이 되레 무서웠다. 남들은 등만 대면 10초도 안돼 쿨쿨 소리를 냈지만 내 눈은 말똥말똥했다. 어느 틈에 ‘기린’이 됐다고 생각했다. 기린은 사바나에 해가 져도 자지 않는다. 달이 뜨면 먹이를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기린이 잠을 자는 것은 해가 뜨기 전 잠깐 뿐이다. 목을 길게 빼고 제대할 날만을 기다리던 ‘기린’의 생활은 지루했다. 또라이들이 득실거리는 광기의 공간에서 폭력과 폭언, 폭음, 이름하여 ‘3폭’은 두려웠다. 군대는 청춘의 꿈이 아니라 악몽 그 자체였던 것이다.

▶개의 후각은 통상 인간의 1만배라고 한다. 후각만큼이나 충성심도 인간보다 몇 십배 낫다. 혈통 좋은 군견은 전방부대의 경비, 수색에서 폭발물 탐지까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군견은 8~9세까지 활동하다 퇴역하는데 사람 나이로 치면 65세쯤 된다. 이때쯤이면 후각이나 탐지, 추적능력이 노인처럼 확 떨어진다. 더더구나 퇴역한 군견은 대개 안락사 내지는 수의대 같은 곳에 학술연구용으로 보내진다. 의로운 죽음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말종이 세상에 널려있는 판국인데….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21세기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은 미국에서만 600만명이 앓고 있다. 때문에 미국기업들은 우울증 치료에만 연간 90조원을 쓴다. 따지고 보면 우울증도 일종의 정신병이다. 그런데 정신병하면 미친 사람, 정신이상자, 부적응, 비정상, 또라이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병은 자신이 환자인 것을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년의 선장은 배를 침몰시키고, 말년병장은 전우를 향해 총질을 하고, ‘깜’도 안 되는 총리후보는 14일을 버티다 낙마했다. 이 무슨 난리통인가.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는 스피노자의 담론이 떠오른다. 통섭하지 않고 너무 가볍게 사는 세상이기에 변종들이 나타난다. ‘또라이’들은 생각이 가볍다. 진중하게 살려면 깊게 파야하고, 깊게 파려면 일단 넓게 파야한다. 그래야 삶의 깊이가 느껴진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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