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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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을 찾았던 그날은 참 더웠다. 봄인데도 여름 같았다. 부는 바람도 여름이었다. 온몸의 숨구멍이 바람 속에서 열렸다. 비옥한 김해벌판에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 오르는 풋것의 단내가 좋았다. 어찌 이리 시골일까. 늘 보아왔고, 겪어왔는데 그 질박한 촌의 모습에 감동은커녕 끌탕이 나왔다. 하지만 한산자의 눈에 들어온 봉화산 자락의 원시(原始)는 원근감을 송두리째 앗아가며 날숨을 내려놓게 했다. 이게 봉하다. 마치 은둔의 맨 뒷전에 나앉은 것처럼 마을은 산들의 품에 안겨 쌔근쌔근 밀회했다. 세상을 안고 또 안는 도량 넓은 사내처럼…. 뒷산 너머 낙동강이 흐르고 마을 앞엔 화포천이 호모에렉투스처럼 직립보행한다. 이건 풍경이 아니었다. 마치 절규 같았다.

▶봉하는 수평으로 나지막하게 자리하지만, 활어처럼 펄떡거렸다. 무엇이 그 에너지를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파시였다. 봉화산은 해발 120m에 불과한 동네뒷산이다. 그런데 그곳에 오르면 주변 40~50리가 다 보인다. 봉하들판과 멀리 삼랑진, 밀양까지 보인다. 그래서 낮지만 높은 산이다. 배산임수의 명당이라고 설레발을 칠 만큼 낮고 또 낮고 또 낮지만 그 높이는 가히 고산이다. 때문에 수사적 장치가 전혀 없이 발가벗은 채로도, 세상의 환란과 핍박을 피할 수 있는 땅이다. 인간, 노무현은 그곳에서 나고 자라고 떠나갔지만, 다시 그곳에 내려와 낙화(洛花)처럼 떠났다. 낙향한 곳이 낙화한 곳이 된 것이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다. 개개비, 버드나무, 노랑어리연꽃, 창포군락이 너울지는 봉하는, 봄에 몸이 마르는 춘수(春瘦)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귀향한 그는 정작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떠났다. 절멸이다. 높이가 30m에 불과한 부엉이바위는 그 옛날 부엉이 떼들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부엉이가 울지 않는다. 아니, 부엉이가 살지 않는다. 더더구나 오래되지 않은 숲은 정돈되지 않은 채 어둑어둑하고 서늘하다. 마치 비수를 만지는 듯 불온한 기운마저 감돈다. 부엉이바위를 위에서도 봤고 아래에서도 봤다. 그 높이는 죽음의 '고도(高度)'가 아니라 살고 싶게 만드는 '고독(孤獨)'의 높이였다.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은 여전히 밑그림 없는 추상화다. 그것은 기어이 올라가야 할 꿈이 아니라, 기대거나 안겨야 할 꿈이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내며 생(生)의 눈을 틔우고 있다. 그런데 지금이 ‘진짜 사람 사는 세상’이냐고 대한민국은 묻고 있다. 두렵고 또 두렵다. 노무현 5주기의 비감이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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