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 칼럼]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

고흐와 함께 후기 인상파의 대표작가인 고갱은 인생의 중반기에 들어선 어느 날, 문명에서 벗어나 원시의 이상향을 찾아간다며 책임져야 할 가족을 뒤로하고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홀로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던 중 어느 날 딸 아린느의 죽음으로 끝없는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1897년 죽음을 염두에 두고 그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라는 작품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에덴동산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순서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맨 오른쪽에는 삶의 시작을 상징하는 아기와 함께 어린 세 명의 여자들이 모여 있으며, 중앙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과일을 따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묘사돼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왼쪽 끝에는 생각에 잠긴 여인과 죽음을 암시하는 늙은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절망 앞에서 선 고갱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자신의 욕망을 찾아 모든 사회적인 책임에서 벗어나 타히티 섬까지 왔지만,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덧없음을 압축적이고 철학적인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다.

제목의 첫 번째 문장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에서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근원을 묻고 있다. 두 번째 "우리는 누구인가?"에는 그는 우리 인간존재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 같으며, 세 번째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는 인간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 혹은 가야 할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번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처절한 절망 앞에 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무참하게 밟았다. 이 사회의 기성세대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큰 죄를 지었고, 그 죄의 한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눈앞에서 잃은 이 땅의 어미로서 가슴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쳐나가는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한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또한 한 나라의 사회인으로서 참혹하리만큼 부끄럽다. 관피아, 정피아, 해피아…. 이탈리아 영화에서나 보던 마피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돼버렸으니 이 모든 책임을 어떻게 다해야 할 것인가. 정치인, 경제관료, 행정가, 교육가, 언론인, 종교인, 공무원, 예술가…. 언제부턴가 타협을 융통성이라는 변명으로 사회윤리를 바꿔버린 사람들, 그 누구 하나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모르고 온 곳처럼, 떠날 때도 한줌의 재로 날라 갈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이에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스스로 무너트리는 어른들이 되지 말자. 아이들아, 용서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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