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따라 바람따라]
27. 방축도 (防築島)
군산시 옥도면 2.17㎢ 나즈막한 섬
마을입구 평안기원 인어동상 눈길
붉은빛깔 단아하게 핀 동백꽃 운치

▲ 수도자 동굴에서 본 바다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명복을 빌며, 가족들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승객보다 먼저 배를 빠져나온 선장과 승무원들이 무너진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것이다. 돈만 벌면 뭔 짓을 해도 된다는, 무슨 방법으로든 권력만 쥐면 된다는, 수단을 따지지 말고 경쟁에서 이기라는 가치관이 빚은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 책임을 참회하면서 여행기를 시작한다.

전북 군산시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40㎞ 떨어져 있으며, 고군산군도의 서북단에서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여 방축도라 이름이 붙은 이 섬은 동서로 길게 뻗은 지형에 가장 높은 곳이 126m로 나즈막하다. 북서사면은 급경사이고, 남동 사면은 비교적 완경사로 농경지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크기가 2.17㎢인 이 섬이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건 몇 가지 실수를 한 탓이다. 당초에는 하루 두 번 운항하는 첫 배를 타고 말도(末島)엘 갔다가 다음 배로 방축도로 이동하여 1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말도에 들어가는 배는 방축도를 들르지만 나올 때는 지나친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엉뚱한 장자도에서 하루 밤 신세를 져야 했다. 방축도 일몰과 일출을 다 놓쳤지만 어쩌랴.

지난 3월 7일 아침 오전 8시 반, 장자도에서 방축도 들어가는 장자훼리호에 몸을 실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드물게 보는 맑은 날씨로 위안을 삼았다. 잠시 바다 풍경을 즐기는가 싶었는데 방축도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배낭을 챙겨 선착장에 내리니 저쪽 섬끝에서 마을을 향해 앉아있는 하얀 인어상이 시선을 끌었다.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거란다. 우리나라에 인어상이 수호신의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섬에 들어서며 마음이 한결 밝은 건 순우리말로 된 표지판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쌩끄미달샘, 뒷장불전망대 등이다. 여기서 끄미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장불은 자갈이 있는 바닷가를 뜻한다.

얼마나 정겨운가? 달샘이란 이름에서는 포근한 고향도 느껴지지 않는가?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전통문화가 응축된 상징임에도 우리는 외국어를 남용한다. 노인분들이 대부분인 섬에 패시브하우스니 에코아일랜드니 하는 간판을 보며 느낀 어색함과는 천양지차다.
?

? ?
▲ 뒷불 전망대

첫 목적지를 찾아 나섰다. 동백숲 공원이다. 이 공원은 쌩끄미 앞에 있는데 선운사 뒷산처럼 넓은 면적이라고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661㎡ (200여평)의 넓이의 땅에 가지런히 그리고 촘촘히 동백나무를 가꾸어 놓았다. 나무들은 2m가 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이른 봄, 눈을 헤치고 핀 한 송이 복수초가 우리 혼을 빼놓는 건 꽃이 많아서가 아니듯 동백나무는 시선을 끌만큼 적당했다. 마침 붉은 꽃을 가지 끝에 멋지게 매달고 있어 운치를 더해 주었다.

숲을 가꾼 주민들의 단아한 마음도 느껴졌다. 이 공원 옆에는 달샘이 있다. 새로 파고 정비한 샘이다. 정비 과정에서 캐낸 작은 돌, 넓은 돌, 긴 돌에 각각 이름을 붙여 샘 주변에 놓고,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달샘 축제를 열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는데 내가 언젠가 축제를 볼 기회가 있으려나? 방축도에는 3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찾는 고인돌은 달샘 맞은 편 야산 중턱에 나뭇가지와 마른 풀로 덮여 있었다. 한반도 고인돌 대부분이 평지에서 발견된 것과는 위치에서부터 다르다. 전에는 표지판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비바람에 쓸려갔는지 세웠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고인돌 위치를 물으며 다니는 나그네가 측은해 보였는지 들에서 일하던 아저씨가 자기가 안다며 안내를 해주셨다. 어찌나 고마웠는지. 땅을 파고 고임돌로 좌우를 받치고 뚜껑돌로 덮개를 한 것으로 보아 남방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재미있는 건 점심을 먹은 호남민박 뒤의 고인돌에서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엽전이 나왔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평범한 돌구덩이인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고인돌로 밝혀졌다는 주민의 말씀을 감안하면 이 섬의 고인돌은 아주 오래된 것이 아니라 섬이라는 특성으로 생겨난 매장형태의 하나로 조선시대에도 이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 된다. 생끄미에서 해변으로 난 길을 따라가 보면 해변에 우뚝 솟은 노적봉 닮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 바위보다 더 좋은 건 인근의 작은 동굴에서 바다와 노적봉을 함께 보는 풍경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뒷불전망대다. 주민들이 영화 쉬리에 나오는 벤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쉬리벤치도 있다. 그만큼 조망이 뛰어나다. 잠시 앉아 시간을 낚으며 섬과 하나가 되는 맛이라니!

이어서 발길이 간 곳은 독립문바위로, 방축도가 자랑하는 명승이다. 물때가 맞지 않으면 직접 바위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독립문바위를 만져보기 위해서는 밧줄에 의지해 절벽을 내려가야 한다.

거길 내려가서 뜻밖에도 절벽 동굴에서 수도하는 분을 만났다.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씀에 기꺼이 좁은 동굴로 따라 들어갔다. 방송사에서 취재를 왔어도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감안하면 나는 행운을 얻은 셈이었다. 가사를 입고 머리를 깎은 외모로 보아 스님으로 추측했다. 꼿꼿하게 설 수도 없는 좁은 동굴 안에는 낮에도 촛불을 켜야 생활이 가능할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

먹고 배설하고 자는 데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고 사는 우리는 동굴에서의 생활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식수도 500여m 떨어진 마을에서 떠온다는 걸 감안하면 그 불편은 짐작이 되리라.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머연을 저 먼 저자거리에 두고 홀로 수도하는 높은 뜻이 뭐냐고 묻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며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어서 뒷불전망대에서 시작하는, 방축도의 등뼈와 같은 능선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등산길에서 문제가 생겼다. 목적지인 정상까지 산행을 마친 뒤 멋진 풍광에 넋을 잃고 있다 문득 배 시간 생각이 난 거였다.

아차 싶어 숨이 턱에 닿도록 내달렸지만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배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듯 옷까지 흔들며 소리를 질렀지만 떠난 배는 무심하게도 푸른 바다 속으로 점점 작아져만 갔다.

섬에서 하루 자야 할까 가야 할까 망설이다 이장을 찾아갔다. 거기서 20여분 거리의 선유도까지 실어다 줄 배가 있을까 싶어서.

이장의 주선으로 작은 어선 한 척을 물색하긴 했는데 선유도에 도착해보니 방조제로 육지가 된 신시도까지 오가는 유람선도, 정기 여객선도, 어민들이 해산물을 군산으로 실어 나르는 배도 모두 끊어진 뒤였다. 뉘엿뉘엿 해까지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선유도에서 다시 고깃배를 불러 신시도까지 나와 차를 둔 군산항까지 택시를 탔다. 잠시 실수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날이었다. 하지만 등산길의 들꽃과 바닷가 조약돌까지 방축도의 모든 것이 벌써 그리워지는 걸 보면 방축도는 참으로 매력 있는 섬이다. 글=민병완·사진=나기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