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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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식구)이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동시에 가장 ‘고까운’ 사이다. 등 돌리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만나는 원거리의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다. 가장 친하고, 가장 소중하다고 느끼지만, 막상 말과 행동은 결코 점잖지 않다. 당연히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막 대하고, 당연히 내 맘 알아줄 것 같으니 맘 내키는 대로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이 공동운명체는 아등바등 살며 '익숙함'과 '미숙함'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가족이란 하대(下待)의 정점에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돼버리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구속력이다. 그래서 어떨 땐 십년지기 친구보다도 못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하지만 결론은 '부대끼니까 가족'이다.

▶가족은 제멋대로 굴고 제멋대로 대해도 멋대로 깨지지 않는다.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접착력이자 행복한 결탁이다. 서로에게 무심해도 그 맘을 알고 그 뱃속을 훤히 아니 그렇다. 만약 '가족이 친구 같았으면 좋겠다'고 바란다면 일찌감치 그 꿈을 깨라. 친구는 내 맘 알아주니까, 내 비위 다 맞춰주니까 더 좋게 느껴지지만 절대 다수는 이기적인 포식자요, 생태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천적일 뿐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게 친구라면, 쓰거나 달거나 삼키는 게 가족이다. ‘식구’(食口)라는 한자를 보라. 말 그대로 오래도록 밥 먹는 사이다. 반면 ‘친구(親舊)’는 오래도록 친한 사이다. 이렇듯 ‘밥’과 ‘사람’과 ‘친함’사이에서 빚어지는 이 오묘한 절충과 융합은 대대손손 습관처럼 전승돼왔다. 다시 말해 친구는 잡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뽑히지 않고 묻어가지만, 식구는 그냥 잡초처럼 버려지며 묻혀지는 존재다.

▶살다보면 엄한(애먼) 사람한테 속 얘기할 때가 더 많다. 엄한 사람한테는 비밀을 담아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족에게는 보통의 '비밀'들을 의뭉스럽게 에둘러 말하지만 엄한 사람에겐 그 '비밀'을 그냥 스스럼없이 깐다. 어쩌면 그 의뭉스러움의 더께가 유대감의 차이다. 한쪽은 기억조차 못하는 일이 다른 쪽엔 굵은 대못이 돼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식구에게 받은 상처가 남이 준 상처보다 훨씬 크고 오래 가는 이유다.

▶밥 먹자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진짜로 밥 먹기 싫어서다. 전화를 하면 대부분 안 받고, 지금 통화하기 곤란하다는 말이 번번이 돌아온다면 그것 또한 진짜 통화하기 싫다는 뜻이다. 설렘이 좋은가? 익숙함이 좋은가? 설렘은 친구이고, 익숙함은 식구다. 설렘은 애인이고, 익숙함은 아내다. 눈에 콩깍지가 쓰여 눈이 멀고, 심장이 콩닥거렸을 때의 그 '첫' 경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설화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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