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 칼럼]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

프랑스 출장에서 만난 한국 화가의 이야기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독촉을 해서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다고 한다. 왜 왔느냐는 프랑스 의사의 질문에 혹시 암이라도 걸렸을까 봐 자기공명영상(MRI) 좀 찍고 싶다고 대답을 했더니 정말 아플 때 오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무분별하게 수술을 권하는 우리 의료계의 현실과는 판이한 프랑스 의사의 태도이다.

며칠 전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에 내리는 순간 동행한 후배가 갑자기 판매대로 뛰어가더니 상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몇 일 전에도 도저히 살 수 없었던 고가의 브랜드 옷을 깜짝 세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쇼핑에 별 취미가 없는 나도 후배를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브랜드 상품의 더미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백화점의 판매 전략에 맥없이 넘어간 것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텔레비전, 라디오, 전광판 등은 광고로 가득하다. 판매를 위한 광고라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대담한 내용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인터넷 광고에서는 신체 부위를 강조하는 여성의 성적 이미지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섰다.

키치문화의 대두와 함께 포르노와 에로티시즘의 차이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은 현대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상품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한 광고는 도덕이나 윤리보다는 우선 소비자의 감각을 자극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라 가볍고 촉각적인 키치문화를 정당화하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대중매체의 힘을 교묘하게 이용해 소비를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미 우리 소비자는 선택권을 대중매체가 주도하는 유행이나 기업이 권하는 이미지에 넘겨주었다. 소비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소비자의 슬픈 운명이다. 더구나 소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소비자는 오히려 소비를 통해 성공과 권위를 과시하고 싶어 하고 그것을 즐기고 싶어 한다. 상품은 더는 효용성으로 구분되지 않고 지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기호 혹은 표상으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기능이 뛰어나고 경제적인 상품보다는 남들이 알아주는 유명 메이커를 우선 선택하게 된다. 결국 소비란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

프랑스인들은 오히려 프랑스의 명품 ‘샤넬’, ‘디오르’, ‘에르메스’, ‘루이뷔통’ 등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상품은 기능성보다 가격이 높아서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른들뿐 아니라 최근에는 어린 학생들까지 명품 병에 걸려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명품을 상품으로서가 아닌 남들과 다른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켜주는 기호로 받아들인 것이다. 실제로 한 여성이 취직하는데 명품으로 입고 갔더니 효과가 있었다는 내용이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는 것을 보았다. 외제 명품 덕에 취직되었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소비문화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명품의 이면에는 기업의 판매 전략에 의해 기형이 된 소비라는 괴물이 숨어서 허영심 많은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노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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