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 칼럼]
전나진 한남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컬처전공 교수

최근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늘어난 다문화 가정과 이에 따른 사회문제들로 인해 부각된 면이 큰 듯하다. 사실 다양성은 다문화와 같은 문화적 차이 외 많은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 성별, 지역, 계층, 직업, 나이, 견해 등에서 차이점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다양성 역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러 입장과 관점을 대변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대화와 타협의 공론을 거쳐 합의로 이어지는 의사결정 형태는 숙의민주주의라 불리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잣대이기도 하다.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는 데에는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과 상이한 견해를 경청하고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한데, 이를 관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통계에 따르면 학력과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관용의 수준이 높다고 한다.

또한, 관용의 수준이 높을수록 계층 간 이동이 유연한 사회라고 한다. 관용은 이처럼 개인 및 사회가 지니는 가치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인종, 민족,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에서 사회통합을 위한 정치권력의 지배논리가 되기도 한다. 북미와 서유럽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차별 철폐 및 동등 기회(Affirmative Action and Equal Opportunity) 정책이 한 예이다.

이와 달리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져왔고 그것이 사회통합의 한 원리이기도 했다. 개성보다는 화합이 중요시되는 정치·경제적 역사 역시 우리의 집단·획일주의적 문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고 세분된 현재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통합의 원리가 필요하다.

나와 다름은 다른 것(difference)일 뿐 틀리거나(wrong) 이상한(odd) 것이 아니라는 기본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나 역시 다른 것 중 하나이고, 이 다른 것들은 모두 가능성이다. 많은 가능성 가운데 결론을 도출하고 합의에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 소통이다.

안타깝게도 매년 12월 31일 국회에서, 공공기관 및 기업 노조 파업의 현장에서, 다문화 가정 출신 학생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성숙한 관용과 소통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2009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소속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한목소리로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했고,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을 국가원수로 만들어 낸 미국민들의 ‘힘’을 자축했다. 이 ‘힘’이란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주류와 현상 유지에 머무르지 않고 소통을 통해 새로울 가능성을 열고 시험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말한다. 바로 관용과 소통의 능력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다. 초고속 인터넷, 최고 기술의 휴대폰, 최고 선명도의 디스플레이는 만들어 내나, 정작 이러한 기술을 통해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고 소통하는 능력은 아직 미흡하다. 즉, 훌륭하게 닦여진 고속도로에서 최고 품질의 차들이 달리나, 제도와 인식 부족으로 교통정체와 혼란, 사고가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012년 우리의 관용과 소통의 가능성을 보았다.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다양성을 견제하기보다는 비판적이고 합리적으로 수용할 때 보다 많은 기회가 생기고 개선과 혁신이 이루어져 나아가 국력의 밑받침이 될 것이다. 다문화 가정 출신의 제2의 김연아 선수와 반기문 총장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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