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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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는 조선말에도 크게 유행했다. 왕조가 멸망한다거나 변란이 곧 닥칠 것이니 피난하라는 내용의 벽서였다. 권좌에서 밀려난 양반, 아전과 노비, 유랑민들이 참여했는데 교수형에 처하고, 귀양을 보내도 대자보는 멈추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던 1980년 독재시대에도 대자보는 유일한 언로(言路)였다. 울분을 터뜨릴 매개가 없던 민초들은 골방에 숨어들어 철야의 격문을 썼다. 죽어있던 말과 언어는 골방에서 '꽃'으로 피어났다.

잠자고 있던 시대의 '양심'도 '문자'로 다시 태어났다. 대자보가 유행한다는 것은 먹고살기 힘들어 '안녕'하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한 학생이 대학을 자퇴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썼다. "나는 안녕하지 못한데, 여러분은 안녕들 하시냐. 행여 안녕하지 못한 세상을 살면서 안녕한 척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편법과 꼼수, 불복과 불법, 국가와 반국가, 내편과 네 편이 판치는 세상은 정녕 안녕하지 못하다. 10대는 공부(경쟁)때문에 안녕하지 못하고 20·30대는 실업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다. 또한 40대는 파리 목숨인 직장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고 50·60대는 노후준비가 안 돼 안녕하지 못하다.

▶어느 노인이 폐지 실은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고 있다. 당신은 자신의 처지가 '저 정도'는 아니니까 행복한가. 아니면 언젠가는 '저런 처지'가 될까봐 두려운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너무 안녕해서 미안한가. '폐지, 리어카, 노인, 고갯길, 3000원'의 공통점은 '글자' 자체에 눈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아무리 '행복'하게 읽으려 해도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깝다. 그 슬픔의 화력은 십구공탄 연탄에 비견할만하다. 더더욱 아린 것은 '시궁창 현실'을 보면서 안녕한 척 하는 '민낯'들이다. 세상은 민낯을 가리고 화장발로 덧칠하고 있다. 육신은 고치는데 마음의 성형이 없다.

▶종교인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고등학생이 대자보를 쓰고 있다. 모두들 안녕하지 못한데 왜 안녕한 척 하느냐며 울분을 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대한민국에 고(告)함'을 친다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시대사조(思潮)는 너무도 천박하다. 지성과 각성, 투쟁과 선동의 대자보는 허울 좋은 하눌타리일 뿐이다. 새해가 밝았다. 세상이 안녕하지 못해도 새해는 또 '안녕'하며 왔다.

아, 내 육신의 안락함이여 안녕, 지나간 한살의 무거움이여 안녕. 너덜너덜해진 민심의 낙서, 그 얼룩진 눈물이여 영원히 안녕. 새해에는 모두가 안녕한 세상에서 안녕했으면 한다. '응답하라. 2014'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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