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돌이 3대 "민생치안 이상 무"

▲ 경찰관 3대 김무열 경사 가족사진.

빵을 훔친 배고픈 도둑에게 오른손으로는 수갑을 채우고 왼손으로는 가장 잃은 식솔 건사에 속 보이는 주머니를 톡톡 털어 주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제복과 사랑에 빠져 고생길을 자처한 아들. 정복 입은 모양새가 뉘 집 자식인지 단박에 눈치 챌 만큼 윗대를 꼭 빼닮은 손자.

아버지는 30년을 하루같이 주민들의 손과 발이 된 김동철(金東喆·76)옹이요, 아들은 충남 서천경찰서의 터줏대감 김무열(金武烈·50) 경사이며, 손자는 3년차 새내기 경찰관 김석민(金汐玟·25) 순경이다.

음지를 어루만지는 가슴 따뜻한 경찰관 3대는 가업뿐 아니라 열정도 대물림했다.씨도둑은 못한다고 호적등본 들춰 내지 않아도 이목구비부터 마음 씀씀이까지 꼭 빼닮았지만 1대부터 3대까지 반세기를 훌쩍 넘기는 동안 시대가 요구하는 틀은 한 지붕 아래 3인 3색의 경찰관을 숙성시켰다.

포돌이 3대의 각별한 경찰예찰은 중간 계투요원 김 경사가 중계했다.

1대 김옹이 경찰에 입문한 것은 법 앞에 무법이 큰소리치던 지난 49년.

"시작은 호구지책이셨습니다. 말 그대로 쥐꼬리만한 봉급이었지만요. 굶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생계의 반 이상은 행상을 하신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월사금 납부 순서로는 한 번도 꼴찌를 면치 못했던 김 경사가 막상 머리 굵어져 경찰이 되겠다고 하자 어머니를 위시한 온 가족이 쌍심지를 켜고 반대했다.

그만큼 경찰 가족의 삶은 고단했다.

"아버지께서는 '네가 원한다면 한 번 해 봐라' 지지해 주시더군요. 그러나 도움을 주시진 않으셨습니다. '민원부서에서 근무하게 되면 입질에 오르내리기 십상이니 조신하게 굴라'는 조언이 경찰관의 길을 가겠다는 저에게 주신 지침입니다."

김 경사가 대를 잇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버지의 어깨를 꽉 채운 계급장과 낮은 곳으로 뻗은 심지 때문이다.

"절도범을 잡고 나서 속사정을 아시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어요. 가뜩이나 주름진 형편에 남 돌봐 주는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저는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유혹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모습도 그랬고요."

1대에서 2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이렇듯 순탄하지 않았지만 김 경사의 경찰 인생은 77년 첫 단추를 채웠다.

김옹의 주요 활동 무대는 파출소, 김 경사는 정보와 경무 파트였다.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부자지간이 한곳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김 경사가 아직 신참 딱지를 떼지 못한 78년 강경경찰서(논산경찰서 전신), 워낙 숫기가 없는지라 우연히 마주쳐도 왕고참의 얼굴을 대할 수 없었다.

아들에게 길을 내 준 김옹은 그해 29년 3개월 6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은퇴했다.김 경사가 교통과에 근무할 때다.

상전 알았다면 경을 칠 일이었겠지만 사정이 하도 딱해 속도 위반 단속에 걸린 소금 장수를 눈 감아 준 적이 있다.

그 소금 장수 어찌 알았는지 물어물어 집에다 소금과 수박 한 덩이를 들이밀었고 영문도 모른 채 인사를 받은 부인만 된통 당했다.

"마침 집에 들어서는데 소금 장수와 마주쳤습니다. 마음만 받겠다고 설득한 뒤 선물은 돌려보냈어요. 그때 제가 딱지를 끊었으면 그 사람은 운전을 할 수 없었고 더 이상 가족들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이쯤 되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낯설지만은 않다.

경찰관으로서의 몸가짐이나 행동은 회초리와 교과서 놓고 공부한 사제지간처럼 닮은 구석이 많지만 가장으로서의 자세는 구식과 신식으로 편이 갈린다.

일에 매달린 김옹이 집보다 파출소에 익숙했다면 김 경사는 가능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김 경사의 기억 속에 가족 나들이는 까까머리 시절 보문산이 전부. 민생치안을 돌보는 직업의식이 몸에 밴 아버지 김옹의 빈 자리가 그만큼 컸던 게다.

2대와 3대 경찰관이 공존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경찰관 아버지를 둔 설움(?)을 자식에게 물리고 싶지 않았던 김 경사의 배려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의향을 물어본 뒤 원하면 어디든 데리고 다녔습니다. 아들 녀석 고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겁니다. 함께 떠난 여행길에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경찰관이나 행정공무원이 되겠다고 하더군요."

의경으로 군 복무 중인 아들이 학교를 중도 하차하고 경찰관이 되겠다고 하자 이번엔 가족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김 경사가 김옹의 업을 이어 받으려 할 때와는 딴 판, 시원찮은 돈벌이에 밥 먹듯 하는 외박으로 특징되던 경찰관의 위상에 견줘 손색없는 직업이 된 덕이다."아버지(김옹)는 눈시울까지 붉히셨습니다. 제일 좋아하신 분은 저를 그토록 만류하시던 어머니셨죠. 저도 아들 녀석이 자랑스럽더군요."

정작 아들에게는 말을 아끼시던 김옹도 손자에게는 '맡은 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 선배들 깍듯하게 모시라'며 인생에서 녹아 난 경험을 숙지시키셨다.

든든한 '빽'을 두고도 덕을 보지 못했던 김 경사. 김 순경에게만큼은 자신의 노하우를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낸다.

세상 물정을 알아야 민심 어디가 가렵고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다며 구석구석 살피라는 당부도 자주 하고, 보고서 작성 요령이나 상사와 동료 대하는 법 등 신참으로서의 역할도 주문한다.

일부는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요, 일부는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귀띔이다.

강철 같던 아버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김옹을 보살피는 김 경사의 손길이 쓰리다.

가업을 잇는 김 경사 일가에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30년 봉직한 김옹의 계급은 경사, 50줄이 된 김 경사와 같다.

아무리 맡은 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경찰관 가족의 가훈이라지만 열심히 일한 사람, 승진 욕심까지 짓누를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막내 김 순경은 벌써부터 구슬땀을 흘리며 승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아들은 보며 김 경사도 성실의 끈을 더욱 조인다.

"아들 녀석이 서울(청와대 외곽 경호)에 근무 중인 관계로 3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경찰 가족의 가장 좋은 장점인 것 같아요. 어려움이 뭔지, 요즘 고민은 뭔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지요."

음지를 보듬는 '민중의 공복' 3대. 믿음 주고 사랑받는 그들의 경찰예찬에는 쉼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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