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금 어디 서있는가

▲ 이우각 <중앙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
역사 속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반드시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중국의 변방으로 머물러 있다가 섬나라 일본의 '앞지르기'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 일은 독립기념관을 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온갖 좋지 않은 기억을 그저 기억 속에 묶어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수천 년 독립을 모르고 살던 백성이 일제 치하를 거친 후 독립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통일신라 이후 통일을 모르던 백성이 분단 이후 줄기차게 통일을 노래하다가 이제는 너무 무디어져 '꼭 해야 되는 거냐'는 등 시들해지고 말았다.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 '가볍게' 변하고 있다.

국가의 최고권부가 외신을 붙들고 실랑이를 하더니 이제는 '가벼운 깃털'인 납품업자를 붙들고 여러 날씩 '추상 같은 감사'를 실시하고 있다.

뉴 밀레니엄(새 천년)인 서기 2000년을 맞이하며 어떤 나라들은 폭죽과 샴페인으로 기를 한껏 살렸고 프랑스 같은 나라는 당대의 석학들을 모아 인류를 이끌어갈 '새로운 정신'을 찾아 나섰다.

대한민국은 그때 팔순을 앞둔 노 정객들에게 맡겨진 채 '벤처 열풍'에 들떠 넋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그때 떠나간 '혼(魂)'은 아직도 구천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너무 '가벼운' 때에 살고 있다. 세상의 불쌍한 일들을 많이 보고 온 어느 여 배우는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며 그 어떤 미래학자보다도 더 밝은 혜안을 번뜩였다.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는 무차별 테러가 일상의 뉴스거리로 변한 지 이미 오래다. 죄 없는 이의 '공개 처형'을 온 세상에 떠들어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파리 목숨'을 지나 이제는 '뉴스거리를 만들기 위한 목숨이고 제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목숨'이다. 목숨에 관한 한 하루살이가 드디어 파리를 이긴 꼴이다.

언제나 '물'이 문제다.

장마철에 느닷없이 '수도 이전'을 놓고 기왕의 반쪽 나라가 더 잘게 부서지고 있다. '배째라'는 '떼쓰기'가 거침없이 나서는 세상은 누가 뭐래도 병든 세상이고 뒤죽박죽 엉터리 세상이다.

구경거리 아닌 것이 '시트콤'이니 뭐니 하며 안방을 파고들더니 이제는 온 국민을 '두 번 죽이는' 꼴불견들이 비 온 뒤 풀 자라듯 무성해지고 있다. '대통령 프로젝트'가 입에 오르내려지는 대신 '대통령의 말'이 나라를 들썩거리게 하고 있다.

헛말인지 막말인지 모르면서 다들 '당쟁'의 도마 위에 올려진 '말 풀이'를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거린다. 통일은 당장 코 앞에 들이닥쳐 있지만 반세기 동안 자유를 한껏 구가해 온 이들은 통일의 노래를 멈춘 지 오래다. 대신 통제의 굴레에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끊기려 하는 통일의 노래를 핏발 선 눈으로 악을 쓰며 부르고 있다.

이제 충청도가 역사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정쟁' 대신 '당쟁'이 판치는 세상에서 충청도의 양심이 서슬 퍼런 날 위에 홀로 서 있다.

'내 맘대로 말한다'는 이들의 시비거리에 올려진 채 들썩이는 땅값, 집값 이야기에 날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는 장차 큰 코 다칠 일을 반드시 겪게 될 것이다. 거품에 둥둥 실려 있는 소금쟁이처럼 잠시 기분 좋다가 그 거품이 푹 꺼질 때 공중으로 휙 날라 올라갈 것이다.

한 쪽은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인데 정작 국가적 소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충청인들이 '값 오르기만 기다리며' 잠자코 있다가는 '두 번 죽는 꼴'을 당하기 십상이다.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역사의 주인공인 충청인이 언제나처럼 '꿀 먹은 벙어리 행세'로 일관하고 있다.

뺑덕 어미나 심 봉사가 아니라 심청전의 주인공은 '효녀 심청'이다. 변 사또나 이 도령이 아니라 춘향전의 주인공은 '성춘향'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입씨름'이 아니라 바로 충청인들이다. 삿갓 쓴 선비는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을 바라보니 절로 한숨만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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