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가을은 '비움의 계절'이다. 거친 말과 거친 행동의 찌꺼기가 내피의 삼투압을 거쳐 세상 밖으로 배설되는 때다. 과거 일에 대한 원망도,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도 다 비우는 것이 '진정한 비움'이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인생은 절정에 선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는 게 어디 쉬우랴. 하지만 비우면서 다시 채워진다. 결국 비움은 채움이고, 채움은 다시 비움인 것이다. '한걸음'이 아니라 '반걸음'으로 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비움은 배움이다.

▶탐라도가 '비울 줄 모르는' 한사람 때문에 시끄럽다. 칠순을 넘긴 제주도 도백이 당적을 또 옮겼기 때문이다. 우근민 지사는 띄엄띄엄이지만 다섯 차례(관선2회, 민선3회)나 제주도 수장을 맡고 있다. 신구범, 김태환 전 지사와 9차례에 걸쳐 나눠가진 재임기간이 무려 23년이다. 그런데 지난 3년간은 민주당을 친정이라고 읊조리다가, 이번엔 새누리당이 친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벌써 일곱 번째 털갈이다. 어른스러운 정치를 보여주리라 기대했던 탐라 사람들은 그의 '변절'에 끌탕을 한다. 불현듯 2013년 8월, 세 번의 시장직을 끝으로 정치무대에서 용퇴한 염홍철 대전시장의 결단이 오버랩 된다. 하나는 제주의 '봄'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대전의 '봄'을 말하는 것이다.

▶염홍철 시장의 페이스북에는 소소한 삶의 얘기가 필부(匹夫)의 담론처럼 녹아있다. 2010년 9월 9일부터 2013년 9월에 걸친 3년간의 소사(小史)다.?

텍스트와 행간의 의미를 훔쳐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비움·空'이다. 불가에서 쓰는 방하착(放下着·내려놓음), 뜻 모를 소란만 남긴 시월의 마지막 밤, 공직자의 길, 이길 수도 질수도 있다는 경기의 법칙,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전환점이라는 지혜, 경주마는 달리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만 야생마는 생각하기 위해 달리기를 멈춘다는 처세를 온전히 말하고 있다.

강태공의 (미늘 없는) 민낚시처럼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다.

▶누군들 욕심과 집착이 없겠는가. 힘겹게 쌓아올린 명예와 재물을 허망히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때 아닌 '염비어천가'를 하는 것은 작금의 천박한 지성과 굴종의 정치에 허망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떠나야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소망해왔다고 했다.

이제 그 뜻을 이뤘다. 모든 걸 비운 그는 명예 대신 자유를 얻었다. 자긍심 대신 자존심을 얻었다. 이제 염·홍·철이라는 여백엔 '비움의 관조'가 아름답게 채워질 것이다. 박수를 보낸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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