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 박진환 사회부 차장

"도대체 이 내용을 왜 쓰는 겁니까?", "우리는 돈 없습니다. 저 기관이 먼저 나서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최근 '궁동 유적'과 관련 필자가 대전시와 충남대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답변들이다. 또 대학본부에 근무 중인 몇몇 교수들과 일부 충남대 동문들은 "궁동 유적이 뭐 대단한 유적이라고,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네.

그냥 다 밀어버리고, 교직원이나 학생들을 위한 복지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궁동 유적은 1999년 충남대가 이 일대에 교수회관과 대학원 기숙사를 짓기 위해 문화재 지표 조사를 하던 중 발견됐던 곳으로, 대학본부 측은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못마땅했다고 한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대학본부 측은 최대한 빨리 발굴을 마무리한 뒤 유물은 박물관으로 보내고, 이 부지에 건물을 올리겠다는 사심은 계속됐다.

그러면서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반대했고, 궁동 유적이 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후에도 이를 철회해달라는 민원은 계속됐다고 한다. 그러나 천만다행하게도 양심있는 몇몇 교수들과 대전시 소속 학예사들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성공했고, 그들의 노고로 지금까지도 궁동 유적 위에는 대형건물이 들어서 있지 않게 됐다.

이 궁동 유적은 충남대 정문 서편에 있는 해발 80m 가량의 얕은 구릉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2월 10일부터 같은해 7월 9일까지 150일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정방형 주거지 3기와 청동기시대 중기의 방형 및 원형 주거지 10기, 집석유구 1기, 석관묘 2기, 토광묘 1기, 원삼국시대 주구토광묘 14기, 토광묘 5기, 옹관묘 1기, 백제시대 옹관묘 1기, 횡혈식 석실분 3기, 석곽묘 29기, 조선시대 민묘 2기 등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들이 나왔다.

이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문화양상을 파악하는데 일조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전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다. 특히 지역이 고향인 시민들조차 '대전은 역사가 없는 곳으로 일제 강점기 철도가 뚫리고, 도청이 이전하면서 생긴 신생 도시'라는 편견을 깨고, 유서깊은 도시라는 점을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증거다.

이에 따라 궁동 유적은 발굴조사 후 지도위원회에서 유적의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는 결론을 맺게 됐고, 대전시 기념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고고학·국사학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궁동 유적은 땅 소유권자인 충남대나 관리 주체인 대전시로부터 모두 천대받고, 외면받으며, 발굴 1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쓰레기만 나뒹기는 곳으로 남아있다.

이곳을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정비하고, 최소한의 편의시설을 설치해 '문화유적공원'으로 조성,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우리 아이들에게 대전의 역사를 교육시키는 교재로 삼자는 주장이 과연 잘못된 생각일까? 또 150만 대전시민은 물론 지역을 찾은 수많은 외국인들과 외지인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알려주고, 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무리한 계획인가?

정말 대전시와 충남대가 돈이 없는 기관들일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자비를 들여 수년간 문화재 환수 운동을 벌이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를 보면서도 지역 문화재의 훼손과 방치를 그대로 못본척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도 욕을 먹을지언정 궁동 유적이 본연의 모습을 찾을 때까지 취재하고, 기사화할 수 밖에 없는 그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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