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 박진환 사회부 차장

충청(忠淸)의 어원은 충북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합해 만든 합성 지명이다. 충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중심 지역이었으며, 고려조 예종 1년인 1106년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로 지칭하면서 처음으로 충청도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후 공민왕 5년인 1356년 정식 행정명칭을 충청도라 하면서 조선조 말기 고종 33년인 1896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리되기 전까지 충청은 지금의 대전과 세종, 충북, 충남을 일컫는 지명으로 통칭됐고, 별칭으로는 호서지방으로 불렸다.

호서(湖西), 즉 충청도민의 성품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언행을 달리했다고 한다. 당시 충청도 양반들은 사려깊게 생각한 뒤에야 말을 했기 때문에 속도가 느렸고, 행동은 신중에 신중을 더했기 때문에 절도가 있었다.

결국 이러한 말과 행동이 이어지면서 충청도 양반들은 느리다는 평을 들었고, 충청인의 대표적인 기질을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고 비유했다. 그러면서도 충청인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한말 의병, 한국전쟁 등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분연히 일어나 호국애족의 정신으로 기꺼이 목숨을 마쳤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충청은 단 한번도 정치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각광받지는 못했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1인=1표'라는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충청은 항상 중앙정치무대에서 소외받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몇년전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대전제하에 세종시, 신행정수도 건설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중심으로 조성되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완성되면 충청은 더 이상 변두리가 아닌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중심지로 성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충청의 단결된 힘이 외부로 용출됐다는 점이다. 세종시 건설이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확고한 명분으로 시작됐지만 지난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면서 충청인의 분노를 샀고, 역설적이지만 충청인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만들었다.

충청권행정협의회를 중심으로 대전시장과 충북도와 충남도지사들은 현역 단체장이라는 신분에도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었고, 지역 정치권과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대정부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대통령 공약사업임에도 수년간 표류했던 과학벨트 조성사업 역시 충청인들의 힘으로 시작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에 2011년 5월 대전(신동·둔곡지구)을 과학벨트의 거점지구로, 세종과 충북 청원(오송·오창), 충남 천안을 기능지구로 지정하는 과학벨트 조성사업이 확정, 발표됐다.

이후 또 다시 정부는 과학벨트 조성이 국가 R&D사업의 핵심이자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부지매입부의 지방자치단체 분담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강요하면서 충청인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결국 대전시가 엑스포과학공원 내 IBS입주를 허용하면서 사안은 일단락됐지만 이 과정에서 받은 충청인들의 상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반면 이를 통해 얻은 수확도 적지 않다. 과학벨트 수정안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충북 등 기능지구를 중심으로 "과학벨트가 수정되면서 기능지구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할 수 없게 됐다"며 충청권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염홍철 대전시장의 정도정치(正道政治)로 사안은 조기에 매듭지어졌다.

최근 개최된 '제24차 충청권행정협의회'에서 염 시장은 "당초 과학벨트 특별법에는 거점지구 내 산업단지 조성만 포함돼 있었다"면서 "앞으로 특별법 개정 과정에서 충남·북도가 요구한 기능지구 내 산단 조성도 최선을 다해 도울 방침"이라며 하나된 목소리가 바로 충청의 힘이라는 점을 재확인시켰다.

이번 협의회에서는 충청권 4개 시·도가 인구수에 비례해 상대적으로 적은 국회의원 정원을 추가 확보하기 위한 선거구 증설에도 상호 협력을 약속했다. 이제 그동안 소외받고, 정치적 약자였던 충청이 하나 된 힘으로 대한민국, 세계의 중심으로 올라갈 때다. 이 중심에 충청인들의 결집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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