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노 웅 (대전 출신·美중부 뉴저지주 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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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노 웅 (대전 출신·美중부 뉴저지주 한인회장)
  • 선태규 기자
  • 승인 2004년 07월 19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4년 07월 19일 월요일
  • 2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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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된 在美한인 실상알리기 분주
   
 
   
 

"미국 내 한인 이민자들의 실상을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사람 중 한 명인 미 중부 뉴저지주 한인회 노 웅 회장은 지금까지 국내 언론들이 미국 내 한인 이민자들의 화려한 면만을 조명해 실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이 같은 소망을 전했다.

그는 현재 미국 뉴저지주에 본사를 두고 있는 Culture&Space Group Corp.과 Ko-Ko Total Inc. 등 두개 업체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Ko-Ko Total은 소매업종을 주로 다루고, C&S는 컨설팅과 제조업을 담당한다.

노 회장의 회사 운영방식은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노 회장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국내 업체가 자신의 생산품 및 활동상황을 서술한 것은 이들 업체들의 업무 성격 및 범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본 제품은 High fashion 의류로 사용되며 가방, 모자, 신발 등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서 현재 미국 주정부 납품 허가업체인 Culture&Space Group 사의 투자로 중국 산동성 위해 유산시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세계 20여 개국에 지사 및 판매처를 갖고 있는 미국 뉴저지주 Culture&Space Group사와 공동 제품을 개발, C&S 브랜드로 제조한 완제품과 본사에서 생산되지 않는 제품도 미국 C&S에서 수입 공급받아 내수 판매 및 수출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경제활동과 함께 한인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구에 자신의 공장이 있어 자주 입국하지만, 1년에 한번씩 한인회 회장 자격으로 청와대의 초청을 받아 대통령에게 이민자들의 실상을 전달하기도 한다.

노 웅 회장은 1956년 조치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충남 대덕군 구즉면 문지리(현재 대덕연구단지가 위치한 문지동)로 되어 있다.

문지초등학교에서 2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갔고, 서라벌 중학교 및 서울 농대 병설 중학교를 다녔으며,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있는 뉴욕 뷰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노 회장이 기억하는 고향은 의 전경은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야만 도달할 수 있는 말 그대로 '깡촌'이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부모님은 서울에 있었고, 노 회장은 할머니, 작은아버지와 함께 살며 주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미역도 감고, 고기도 잡고 배나 포도서리 등을 했던 기억은 그에게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그는 쌀밥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서 방앗간을 하는 친구와 친해졌다. 그 친구는 여자 아이였다. 누가 괴롭히면 그들을 퇴치하는 게 그가 쌀밥을 먹는 대가로 해야 할 임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올라왔다. 보자기로 책보를 만들어 몸에다 묶고 다녔다. 서울 아이들이 멋진 가방을 메고 다니던 때였다. 아이들의 놀림을 받던 그 때, 냉면집을 하는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배고픈 김에 냉면이 국수인 줄 알고 막 먹었는데,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가 안더라구. 숨 막혀 죽겠더구만."

입 안에만 넣으면 자연스레 부스러져 목 안으로 넘겨졌던 국수 생각만 하고, 냉면 면발을 마구 삼켰던 것이다. 그 이후 그는 20세까지 냉면에 대한 안 좋은 기억으로 먹지도 않았고, 냉면 글자만 나와도 진저리를 쳤다.

시간이 흘러 골프장에 간 적이 있다. 그 때는 냉면 공포증(?)을 어느 정도 극복한 때였다. 옛날 기억을 더듬어 냉면을 시켰고, 반찬으로 해파리 냉채가 나왔다. 해파리 냉채를 입에 넣었는데 질겼다. 진짜 고무줄이었다.

책보를 끼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공기놀이'를 잘했다. 주로 어울리는 친구들이 여자 애들이었고, 그는 공기로 여자를 통일했다. 그렇잖아도 남자 아이들로부터 놀림받던 시기에 이런 그의 모습은 더욱 그들에게 못마땅하게 여겨졌을 것은 안 봐도 훤하다.그래도 공부는 꽤해 한 학년이 1000여명씩 되는 학교에서 전교 11등까지 한 적이 있다.

친분 있는 교수가 "앞으로 코디네이터 쪽에 비전이 있을 것"이라는 제안을 했다. 예고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갔다. 그는 볼티모어에서 언어과정을 마쳤으며, 뉴욕 뷰티 칼리지에서 '코디네이터'를 전공했다.

미국에 갔던 그는 처음에 학교도, 돈도, 미국에서의 생활을 위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결과 하루 3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하루 일과는 새벽 3시에 일어나 breakfast shop에서 오전 6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자동차를 해체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공립학교에서 오후 6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수업을 들었다. 공장이 오후 6시에 끝나고, 수업이 오후 6시에 시작했기에 그는 항상 지각했다. 밤 10시30분부터 새벽 1시까지는 아파트 청소를 하는 시간이다. 이런 생활을 노 회장은 3년 정도 반복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part time job)로 벌었던 얼마 안된 그의 월급의 30%는 세금으로 나갔고, 아파트세, 식비 등으로 쓰면 손에 남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당시 성실하게 냈던 세금납부 기록으로 인해 신용이 우선인 미국사회에서 현재까지 우수한 신용등급을 보유하고 있다고 그는 자랑했다.

신용등급이 나쁘면 차 1대를 사더라도 보증인이 필요하고, 돈을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고급 아파트에 세를 들어 입주할 수 없다. 낮은 신용점수가 꾸준히 방세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대변하기 때문이라고 노 회장은 설명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유태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5년 정도 일하면서 신뢰를 쌓았고, 일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후 현재의 업체를 인수해 아웃소싱을 받아 활동하는 직원까지 포함, 전체 직원이 170여명에 달하는 회사의 경영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웃소싱제를 도입한 것은 미국식 비즈니스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화교들의 상인 네트워크를 활용, 전 세계에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아웃소싱제와 전 세계 상인네트워크는 노 회장 사업의 핵심이다.

그는 현재 미국 내에 있는 경제인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특히 10여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뉴욕·뉴저지주(동부) 충청향우회의 회장으로 취임할 것을 권유받고 있는 중이다.

경제인으로서 그는 외국 투자자들의 자본을 국내에 유치하는 데 힘쓰고 싶다고 했다. 충청인이자 한인으로서 노 회장은 한인 동포를 위해 그들의 실상을 알림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국내 주요 언론들은 미국 이민자들의 화려한 결과만을 부각시켜 왔다. 그러나 노 회장이 직접 겪었던, 현재 미국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생활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예를 들면 20평 남짓 아파트에 칸막이를 두고, 3가구가 모여 사는 게 이민자 생활의 현실이라고 노 회장은 말했다. 노 회장도 정착 초기에 그런 생활을 했지만, 그런 이민자들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대전, 충남·북지역을 위해 하고자 하는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노 회장은 "충남·북지역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계획은 있지만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다. 충남·북에 거점을 두고 일할 마음의 자세가 있다"고 짧게 답변했다.

그의 좌우명은 'You can but to do'다. 전략적인 것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 그의 소박한 꿈들이 그의 전략적인 사고 속에서 착실히 현실화될 것을 기대한다.  

< 노 웅 美뉴저지주 한인회장은 >

▲ 1956년 대전 대덕 출생

▲ 안양예술고등학교 졸

▲ Culture&Space Group Corp. 및 Ko-Ko Total Inc. 회장

▲ 미국 중부 뉴저지주 한인회장

▲ 해외 무역인협회(OKTA) 상임이사

▲ 평통 뉴욕협의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