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지붕' 최초 정복 '나이'장벽 깬 인간승리

태초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한 미지의 땅을 밟는 순간, 온 몸을 타고 오르는 전율에 정신이 아찔했다. 마치 축복하듯 온 누리를 은은하게 내리 비추는 달빛과 새하얀 눈빛이 맞부딪쳐 뿜어내는 오묘한 파노라마는 무아지경의 극치를 연출했다. 1982년 11월 2일 오후 6시 무렵, 수만년 처녀성을 간직한 히말라야 고줌바캉(ngozumbakang·티베트어로 세 정상을 가진 설산이라는 의미)봉은 그렇게 그를 허락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최고봉 중에 하나인 고줌바캉(7806m) 봉우리를 정복한 김영한(金英漢·57)씨, 불굴의 정신 앞에서는 인간의 한계도 무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를 만났다.

지금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지만 지난 77년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정복 등반대의 일원으로, 78년 북극 탐험대의 선봉으로 오지를 누비며 초창기 한국 산악인을 대표한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뭐니뭐니해도 산악인으로는 환갑의 나이인 37살에 세계 산악사를 다시 쓰게 해 준 고줌바캉봉이 기억에 남는다.

"고산정복은 실력뿐 아니라 운이 따라야 합니다. 적어도 고줌바캉을 등정하기까지는 천운이 따라줬습니다."

인위가 배제된 그의 고줌바캉 등정기는 기획부터 상영까지 3년의 제작기간이 소요된 한 편의 격동적인 드라마다.

그래서 최고의 집단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제작사들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장엄한 스케일과 감동을 선사한다.

그를 등반대장으로 낙점한 대전자일클럽은 지난 80년 히말라야 정복이라는 야심찬, 그러나 녹록지 않은 계획을 세웠다.

"정석모 지사가 사재를 털어 3000만원을 쾌척해 주시고, 뜻 있는 산악인들의 찬조가 줄을 이었지만 워낙 큰 돈인지라 고생 꽤나 했습니다. 정보력 부재도 시작부터 난항을 부채질했구요. 당시 네팔 정부에서는 히말라야 봉우리에 대한 휴식년제를 실시했었는데 고줌바캉은 82년 가을에나 문호가 개방된다는 것을 1년 후에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81년 출간된 일본 등산잡지 '산과 계곡'만 아니었더라도 자일클럽은 고줌바캉이 아닌 다른 봉우리를 노크했을 것이다.

"5대양 5대봉을 점령한 일본의 탐험 영웅 우에무라 나오미가 수기를 통해 '고줌바캉에 올랐을 때 너무 힘이 들어 정신착란 증세가 발생, 정상을 밟았는지 인근 봉우리를 밟았는지 미심쩍다. 따라서 누군가 고줌바캉을 최초로 등정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할 말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고줌바캉이 미지의 세계로 공개된 셈이죠."

목표가 정해지자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러나 우에무라의 고백에 고무된 세계의 눈들이 너무 많았다.

자일클럽뿐 아니라 프랑스 원정대와 프랑스, 독일, 영국의 산악인들로 구성된 국제등반대도 82년 포스트몬순에 입산허가를 받아 오히려 베이스캠프에 선착한 것이다.

"먼저 도착한 팀이 등정 루트를 결정하면 다른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그 때부터 피 말리는 눈치작전이 시작됐습니다. 자칫하면 정상을 내줘야 하는 형편이었으니까요."

천우신조라 했던가. 지각이 오히려 약이 됐다.

밋밋한 코스로 오른 프랑스팀이 눈사태로 전진하지 못했고, 선장 많은 국제등반대는 분란으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결국 네번째 캠프인 C4에서 그들을 추월했다.

애초 그는 정상 정복조가 아니었다.

C4에 도착한 10월 31일은 네팔관광성에서 허가한 등정기일의 마지노선.

베이스캠프에서 자일클럽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네팔 관광성 파견 연락관의 배려로 불과 며칠을 연장했을 뿐이었다.

선발대를 이끌던 그는 별 수 없이 공격을 단행했다.

37살이면 업계의 퇴물, 그러나 고산병이 도사리는 고봉 등정에는 조급함보다는 경륜이 많은 고참들이 유리한 법.

혈기왕성한 대원들은 C4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는 셀파 2명과 정상정복을 시도했다.

"C4에서 사흘을 체류하는 동안 식량공급이 중단돼 버렸습니다. 눈을 녹여 부족한 수분만 채우며 두 번을 공략했지만 수포로 돌아갔지요. 사흘째 되던 11월 2일 이른 새벽 베이스캠프에서 마지막 정복명령이 떨어지더군요. 신발 끈을 매는 데 1시간이 걸릴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는데 말입니다."

새벽 6시 마지막 투혼을 발휘, 오후 1시에는 전방 200m고지를 밟을 수 있었다.

수십일간의 사투, 체력이 소진한 그는 정상공격을 불과 몇m 남기고 갑자기 30여년의 인생이 필름처럼 연상되는 사선에 이르렀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구요. 그래도 무슨 힘이 솟았는지 이렇게 내려갈 수는 없다는 책임감이 발동했습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해는 떨어졌지만 온 천지가 밝았다.

음력 14일, 그렇게 투명하고 아름다운 달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환희는 찰나에 불과했어요. 증거자료가 될 사진을 찍고 빨리 내려가야 했거든요. 마치 누군가 인도하듯 달빛을 밟으며 캠프로 내려왔는데 연신 눌러댄 필름이 허사가 돼 버렸습니다."

또 한 번 낭패에 봉착했지만, 입산 허가일을 연장해 준 관리관이 역사적 순간을 육안으로 확인해 준 덕분에 그는 세계 최초이자 국내 최고령 히말라야 등정자로 기록될 수 있었다.

고줌바캉을 손에 넣은 뒤 그는 현역에서 은퇴, 10여년 동안 대한산악연맹 지도자로 후배들을 양성했다.

지난 66년 자일클럽과 충남산악연맹 창립 멤버를 시작으로 명실공히 국가대표 산악인이 된 그지만 남극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라는 이유로 79년 남극탐험이 좌절된 것은 못내 아쉽다.

IMF외환위기를 겪으며 30년 직장인 한국수자원공사를 떠난 그는 생활인으로 모진 세파를 극복해야 했다. 틈틈이 써 온 산악일기와 자료들을 토대로 산악인생의 수기를 쓰고 싶다는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며, 적어도 자신은 행복했다고 만족해 했다.

"산이 좋은 이유요? 자연이 좋고 젊은 시절 자신을 시험하는 무대로도 그만입니다. 순간 순간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키워 준 것도 산이 준 선물입니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 그는 지금도 야트막한 산을 오르며 자연의 섭리에 머리를 조아리는 영원한 산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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