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기 대상 오경희씨

오늘도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찾아든다.

장사군들은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서둘고 있다.

두부를 팔던 젊은 부부도 집으로 간다. 홀몸이 아닌 안해를 삼륜차에 싣고 남편은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그런 남편을 안해는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하루 장사에 생긴 잔돈으로 샀는지 시금치 한단이 안해의 왼손에 들려져있었다.

이제 그들 부부의 저녁상에는 양념을 묻혀 만든 시금치반찬이 오르리라. 젊은 부부의 소박한 저녁밥상을 떠올리면서 나는 저도 몰래 입가에 웃음을 물었다.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행복할 때 그 행복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불행할 때만이 그것이 행복이였는데, 그때가 행복했는데 하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는 작년 11월 29일에 뜻밖의 불행을 겪게 되였다. 짠지장사를 하다가 중풍이 온 것을 친구가 발견하고 즉각 병원으로 호송했었다.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병원복도를 걷다가 큰거울에 나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그 순간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쪽 눈은 고인물 같았고 입은 귀에까지 곧추 올라가 있었다.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면서 나는 더는 마을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예고도 없이 문뜩 찾아온 불행 앞에서 나는 삶의 용기를 잃고 병원복도에 쓰러지고 말았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남편의 강권에 마구 대항하다가 아들과 딸 그리고 친척, 친우들의 거듭되는 청을 못 이겨 치료에 응했다. 아픈 침을 맞기 시작했었다.

지금 녀인들은 반듯한 얼굴임에도 더 예쁘게 가꾸려고 고급화장품이요, 피부미용이요, 정형수술이요 하는데 '이 천덕꾸러기'는 엄마가 준 얼굴마저 때 아니게 삐뚤어졌으니 생각할수록 서러웠다.

18가지 짠지를 만들어가지고 춘하추동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를 해서는 아들딸의 뒤바라지를 했었다. 오로지 아들딸을 남들처럼 출세시켜보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버텨온 세월들이였다. 고생도 아픔도 눈물도 다 그 곳에 묻어두고 말이다.

인젠 매대에 나설수도 없게 되였고 내 피흐름으로 간주하는 문학행사에도 참가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고 아파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상심에 나를 맡기고 있을 때가 아니였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다.

자식들이며 그렇게 좋아하는 문학이며…

나는 마음을 추스리고 치료에 달라붙었다. 탕약이면 탕약, 서약이면 서약, 토방법이면 토방법, 침구면 침… 아무튼 병에 좋다는 약과 방법은 다 썼다. 그렇게 백날동안 악착스레 치료한 결과 건강이 회복되였다.

그 동안 나 주변에는 정말 고마운분들이 많았었다. 그런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너무 고마운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에 받들려 나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동안 나를 맡아 치료하던 담당의사선생님을 그렇게도 극성스러웠고 간호사들도 그렇게도 친절하고 책임감이 높았었다.

그들은 우리 생활형편을 고려해 하루 침값 10원을 받지 않았고 약도 약방에 가서 싼값으로 사다 주었다.

정말 고마왔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과 도움은 나에게 병을 이겨내려는 크나큰 용기와 신심을 주었다.

남편은 매대를 보면서도 시간을 타 나의 병시중을 들었는데 언제 한번 짜증을 내지 않았다. 나의 병에 좋다고 하니 피마주를 찧쪼아서는 하루에 두번씩 갈아 붙여주었다.

15년 짠지장사에 몸이 망가졌다며 영양보충하라고 백원씩 나의 손에 쥐여주는 친척과 친구들이 눈물나게 고마왔다.

치료하기를 포기하고 있을 때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나를 막무가내로 이끌고 병원에 데리고 가 약을 사주고 침을 맞히던 오빠와 올케도 잊을 수 없다. 문학선배 김영금선생님은 소문을 듣고 중풍에 좋다는 약 삼백원어치 사오고도 또 200원을 내 놓으셨다.

그리고는 날마다 병문안해왔다.

문우 김수녀님도 소갈비와 소고기를 들고와서는 치료비에 보태라고 500원을 내놓았었다.

병문안을 왔다가 4000원을 치료비로 선뜻 먼저 대준 설추언니의 마음도 눈물나게 고마왔다. 이밖에도 리경자님, 어머니수필회 회원님들, 동업자들…이런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마음을 받으면서 나는 행복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 것같았다.

백날동안의 치료를 받고 삐뚤어졌던 입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석달반의 투병생활에서 인간에게 왜 불행이나 빈곤 또는 질병조차 필요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이번 일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무엇이 고마움이고 무엇이 행복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냥 제멋에 잘 살고 있는 줄로만 알고 얼마나 오만했을가?

그리고 가족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찬 것인지도 잘 몰랐을 것 같다. 치료기간에 늘 옆에서 맴도는 남편과 자식들이 그때처럼 귀하고 소중한적이 일찍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변에 좋은 친척과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앞 뒤 매대에서 아득바득 장사해서 아들딸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고뇌에 빠져 슬퍼하고 괴로와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건강을 잃고나서야 그것을 알았다. 중풍이 와서 눈이 몹시 아프고 입이 삐뚤어져서 침을 한쪽 얼굴에 15대씩 맞을 때 돈, 명예, 권력, 아빠트…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욕심나지 않았다.

건강할 때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나였다.

건강을 다시 찾은 지금 나는 그저 행복하다. 아직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뭐가 대수랴! 거울 속의 내모습 예전대로 반듯한데 말이다.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투병생활이 꼭 불행만은 아니였다.

되려 그 불행이 행복을 찾는 열쇠로 되였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결혼한지 20여년이 되였지만 아직도 온돌집에서 연기에 그을며 사는 것이 싫어서 저 높은 아빠트를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삶의 재미와 멋도 각각이라고 아기자기 밥짓는 냄새맡으며 따뜻한 온돌방에서 살아가는 요즘은 아빠트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둥그런 밥상에 빙 둘러앉아 구수한 숭늉을 훌훌 불면서 마시는 맛은 또 어떤가?

행복은 느낌인 것 같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지금 살고 있는 내 모습에 만족하는 것이 어쩌면 이 세상을 밝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10년은 길거리에서 짠지장사를 하고 이제 5년째 매대를 얻어 짠지장사를 하면서 나는 내 짠지를 사주러 자주 오는 사람들에게 한저가락이라도 덤으로 얹어주었다. 건강이 회복된 오늘도 나는 여전히 그렇게 열심히 장사하고 있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덤이 쌓이고 쌓여서 내가 병으로 쓰러졌을 적에 크나큰 사랑과 우정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는 그런 사랑으로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 기쁨과 행복을 줏느라면 나는 하루해가 긴줄을 모르고 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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