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후 열심히 살겠습니다"

▲ 2002년 안면도 국제꽃박람회 나들이. 경우씨 가슴에 담긴 생전의 어머니<사진 오른쪽> 모습이다. /사진=신현종 기자
15척 담장으로 둘러싸인 대전시 유성구 대정동 36번지, 그를 만난 곳은 대전교도소다.

남경우(南京祐·33)라는 멀쩡한 이름 대신 수번 '3089'로 불리는 그의 얼굴엔 1년 전 막내아들 면회 길에 쓰러져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어머니 김금화(金金花) 여사의 그리움이 서려 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경우씨 불끈 쥔 손아귀엔 '적을 만들지 말고 인정을 베풀어라'는 당신과의 마지막 약속이 틀어쥐어 있다.

"아파도 아프다 소리 못하시고 힘들어도 힘들다 소리 안 하셨습니다. 제 앞에서는 늘 의연하셨어요. 농사일 하시랴 못난 아들 옥바라지하시랴 농번기 틈을 내 4개월 만에 찾아오시는 길이었습니다."

어머니 작고하신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의 말처럼 4개월 만에 막내 얼굴 보러 가신다며 집 떠난 지 얼마지 않아 쓰러지셨고, 달리 손쓸 방도 없이 눈에 넣어 아프지 않을 막내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가셨다.

손발 다 묶인 처지, 임종은커녕 성묘 한 번 못한 것이 수감보다 더 큰 형벌이다.

"몹쓸 짓해서 가슴에 못 박고 그 상처 어루만져 드릴 새도 없이 보냈으니 세상천지 이런 불효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월의 추를 돌려 고향 충북 옥천으로 향하면 생부처 같은 어머니와 엄한 아버지, 경우씨 위로 형과 누나 둘이 소담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장롱 속에 금송아지를 키우지는 못했어도 아버지 땅 부리시는 것만으로도 끼니 걱정할 형편은 아니었다. 막내 어리광에 주름지는 줄 모르던 어머니와의 추억은 속리산에 묻혀 있다.

"6∼7세 때였을 겁니다. 촌에서 어린이날 챙기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었죠. 아침 논일을 나가셨던 어머니께서 입가에 잔뜩 미소를 묻히시고 들어오셔서는 그중 깨끗한 옷을 챙겨 입히셨죠. '아버지 허락하셨으니 속리산이나 다녀오자꾸나' 하시더군요. 왼편으로 큰누나 손을, 오른편으로 어머니 손을 잡고 보무도 당당하게 최고의 날을 만끽했습니다."

소문난 불자였던 어머니 따라 이웃집 마실가듯 절집을 드나들기는 했지만 가슴 설레는 나들이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머니 품에서 보낸 학창 시절은 수더분하고 착실한 아이였다.

한창 뛰어놀 나이 친구들에 정신팔려 한두 시간 늦게 귀가하면 여지없이 아버지의 꾸지람이 뒤따랐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시험공부 하느라 늦었느니', '심부름을 시켜 늦었느니' 민첩하게 핑계를 대 주시며 수호천사가 돼 주셨다.

▲ 남경우씨
하늘만큼 넓고 봄 햇살보다 따뜻한 치마폭을 내주시는 어머니께 경우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굼슬겁게 굴며 '이 다음에 커서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것이 전부다. 지극히 평범했던 경우씨 인생이 엇박자를 타기 시작한 것은 남들 철들 나이인 스무 살 무렵.

직업훈련원에 가기를 바라셨던 아버지에 맞서 사설 학원에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청에 힘입어 원하던 옥내 배선 자격증을 땄다.

"첫 월급 타 속옷을 사드렸습니다.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그때는 잘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의 대가는 너무 잔혹했다. 학원에서 줄을 대준 업체는 말 따로 현실 따로였다. 열악한 작업환경은 젊은 혈기를 붙잡지 못했고 경우씨는 한순간 욱 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법은 초범에게 집행유예라는 선처를 베풀었지만 이미 어머니의 가슴은 숯덩이가 돼 버린 뒤였다.

"아무 말씀 없이 우시기만 하더군요. 그리곤 한 말씀 던지셨습니다. '앞으로는 남에게 해코지하지 말고 사회에 인정받는 사람이 돼 달라'고. 그 부탁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돕던 경우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는 기특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이 경기도 안산이다.

밑바닥부터 배워야 하는 견습공의 하루는 고단했지만 선반 밀링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엿한 기술자가 돼 한 2년 어머니의 바람대로 착실하게 살았다. IMF라는 만만찮은 장애물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한파에 좌초된 직장, 새벽 인력시장을 헤매며 닥치는 대로 일감을 찾아 다녔다.

"이상하게도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면 힘이 솟았습니다. 정히 참기 어려우면 전화로 넋두리를 늘어놓았죠. 그럼 없던 기운도 솟았거든요."

살아 보겠다는 몸부림은 두번째 고비에 막혀 또다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밟아 버렸다.

그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경우씨. 아리랑 고개를 넘듯 형기 5년 중 4년8개월여를 보내며 옛날 옛적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세계를 되짚고 있다.

전과자라는 낙인은 손가락질당하기 십상. 일 년을 하루같이 정화수 떠 놓고 못난 아들의 귀향을 염원했던 어머니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가시덩이다.

"어릴 적 본 부처님 같은 표정으로 꿈속에 나타나세요. 쉬고 싶을 때나 힘들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꿈속에서 저를 보듬어 주십니다."

자신 때문에 화를 당하신 것 같아 가시방석이 따로 없는 경우씨. 딸린 별 때문에 귀휴를 가지 못한 것이 뼈에 사무치게 죄스럽다.

김치찌개나 나물 찬이 나오면 식판에 어머니 얼굴이 아른거리고 탐스럽게 물오른 복숭아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지난 3월 5일 때 아닌 폭설에는 유난히도 눈을 싫어하던 당신이 흘린 눈물인가 싶어 하염없이 울었다.

손재주와 눈썰미 좋은 경우씨. 요즘엔 가죽 부리는 기술을 배우며 어제와 다른 내일을 설계한다. 김현태 소장 등 대전교도소 식구들도 성실한 모범수라며 칭찬에 입이 마른다.

"출소하면 어머니 찾아뵙고 용서를 구할 겁니다. 참한 여자 만나 홀로 계신 아버지 모시고? 다복하게 사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럼 어머니도 용서해 주시겠죠."

5년의 만의 귀향은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이 버선발로 마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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