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울리고 웃긴 '강연계 우먼파워'

▲ 정덕희 교수

충청도 여자라서 떴다고 자부하는 그는 정덕희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교수. 방송인이자 명강사로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MBC '브레인 서바이버', KBS 아침마당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정 교수는 지난 97년 황수관 박사와 함께 명강사로 대중에 알려졌고, 98년에는 구성애씨가 부각됐지만, 현재 우리는 정 교수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토요일 오전, 정 교수를 만났다. 이날도 그는 방송 출연과 여성 잡지 인터뷰 때문에 20분이나 늦어서야 나타났다. 어떤 선입관도 없이 '고향'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점심 때문에 자리를 옮기면서도 4시간 내내 이야기 끝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정 교수는 충남 예산군 예산읍 신흥동 시장통에 있는 형제쌀집 12남매 중 거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예산초등학교, 예산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그는 흔적없고, 내숭 떨고 쌀쌀맞은 아이였다. 임성동이란 부자동네가 있었는데, 왜 난 이런 시장통처럼 가난한 동네에 사는가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던 듯싶다.

정 교수가 당시 얼마나 밥맛 없는 아이였냐 하면, 사촌집에 놀러가서 친척 아이들이 놀 때 혼자서 설거지를 했고,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놀 때 혼자서 유리 조각을 주우러 다녔다.

"난 내가 어릴 때부터 뜰 줄 예감했던 것 같아. 이미지 관리를 그때부터 했었어."

흔적없는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어머니가 촌지 대신 종이 200장을 둘둘 말아 정 교수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왔다. 그후 어머님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 교수의 성적이 훌륭했고, 이때부터 성적 발표하는 날은 아버지의 묵인하에 예산극장에 다녀오는 날로 바뀌었다.

이 시절 집 앞 개천에 서커스가 많이 열렸다. 정 교수는 거의 끝날 때쯤 공짜로 들어가 피날레를 구경했다. '삐빠빠 룰라' 같은 노래도 배우고, 광대들의 익살도 따라했다. 예산 출신의 탤런트 장항선씨도 이때 처음봤다. 손님들이 집에 오면 장기자랑에 열을 올리는 정 교수는 이때부터 기쁨조였다.

이때는 월남전이 한창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조용히 노는데, 정 교수를 비롯한 살벌한 여자 아이들은 예산초등학교 뒤편의 금오산에 올라가 입으로 따따닥 쏘아대는 총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솔방울은 폭탄이다. 총에 맞거나 솔방울이 터져 아이들이 쓰러지면, 곱상하게 얌전빼는 아이들이 솔잎을 들고 깡충깡충 다가가서 그들의 입에 넣어준다. 아이들이 다시 살아나 전투는 재개된다. 백병전이 펼쳐질 때는 개나리 줄기를 꺾어 칼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런 정 교수가 관양산에 흙으로 몰래 자신만의 왕궁을 만들었다. 친구들과 이따금씩 놀러오는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그는 공주였다.
?봄이면 향천사 계곡을 다니며, 친구들과 나물을 캤다. 봄나물의 이름을 자기들 맘대로 붙였다. 이른 봄에 논흙을 뒤집으면, 하얀 알맹이가 나온다. 정 교수는 그걸 먹었다. 삐비라는 것도 먹었고, 아카시아나 찔레나무 줄기도 벗겨서 먹었다.

◆진정한 공주(?)로 거듭나는 정 교수

중·고교 시절 내내 그는 반장을 맡았다. 또 선생님 구두를 닦거나 버스정류장 청소를 도맡았다. 예산여고 최초로 자그마한 시화전을 열었는데, 그 당시를 기억하는 선생님들은 그렇게 멋진 시화전은 처음이라고들 했다.

여자들의 밥맛을 자극하는 에피소드 하나. 그를 사모하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예산농전 학생들이었는데, 그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막 울었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 때문에 연애를 죄악시한 습성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신데렐라의 꿈'이 있었다. 백마탄 왕자를 만나 편하고 호화롭게 파티를 즐기면서 사는 것. 당시는 가난한 사람들만 일했고, 무슨 일하냐고 물을 때 "놀아요"라고 새침떼며, 신부수업에 열중인 아가씨가 가장 부러움을 받던 시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은 채 서울에 상경했다. 73년 10월 31일 서울행 무궁화호 장항선 마지막 열차였다. 꿈 많은 소녀가 가정 형편 때문에 원하던 대학 진학을 접고, 홀로 상경하던 그때를 정 교수는 '비참하게 떠났다'는 말로 대신했다.
기차 안에서 그는 서럽게 울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25년 뒤인 97년 한달에 100시간씩 강의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유명 강사의 신분으로 예산역장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울행 새마을호를 기다리는 신분으로 바뀌었다. 예산문화원에서 그녀를 초빙했던 것이었다. 물론 이때는 넓은 대지 위에 전원주택을 가진 부잣집 아들을 만나 결혼을 해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뒤였다. 그게 슬픔의 시작이었지만 말이다.

◆정 교수의 말과 고향

"무소유의 자유도 좋지만, 소유의 자유도 괜찮아. 선택은 자유지", "근데 내가 볼 때는 소유의 자유가 좀 나은 것 같아"라며 까르르 웃어댔다. 정 교수의 말들은 유명하다. 이날도 공주의 흔적이 담긴 명언을 시작으로 말의 잔치가 한바탕 펼쳐졌다.

14년간의 강의하면서 그는 전국 곳곳을 최소한 5번 이상은 누볐다. 500개의 '정덕희 말말말'은 7년 동안 강의하면서 얻은 산물이다.

이 날도 그는 기자가 빌려준 수첩에 자신이 했던 말 중 자신도 모르게 했던 어구를 "멋있다"고 자평하며 메모하기 시작했다. "가짜 연출은 들통나지만, 진짜 연출은 남을 감동시킨다"는 어구가 그런 것들이었다.

"다른 지역은 몇 년 뒤에 가 보면 발전하는 것이 눈에 띄는데, 예산지역은 오히려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는 강의를 다니면서 늘 어떻게 하면 고향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고심했다고 했다. 작은 분지 양 옆에 길을 낸 군의 행정을 '맛대가리 없는 행정'이라고 비판했고, 안온한 분지이기에 민속촌 등으로 개발하면 끝내 줄 것이라고 아이디어를 냈다.

"고향은 정서적으로 사람을 풍요롭게 만들어요. 고향이 시골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죠."

그의 안타까움은 애향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건전한 여성 정신 문화를 만들고자 그런 목적의 기관을 운영하는게 꿈인 정 교수. 그는 그 기관의 이름을 '빛&향' 정신문화연구소라고 이미 지어놨다.

"정덕희는 충청도 여자라 떴시유~." 그의 이 말 한마디가 귓전을 울린다.?



정덕희 교수는...
▲ 1954년 예산 출생
▲ 1973년 예산여고 졸
▲ 1992년 동국대 교육대학원 수료
▲ 1996년 연세대 교육대학원 고위자과정 수료
▲ 숙명여대·호서대 강사, 경인여대 교수
▲ 삼성·현대 등 1000여 기업체 출강
▲ SBS 라디오 '정덕희의 신나는 세상' 진행
▲ 충주방송 '정덕희의 행복하소서' 진행
▲ KBS 아침마당 '토요이벤트' 고정 출연(현)
▲ SBS '오픈스튜디오 진행'(현)
▲ 현대여성교육원장(현)
▲ 현대시인협회 회원(현), 이미지컨설팅 대표
▲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현)
▲ 2002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여성특보
<저서> '변신하는 여자', '신세대 여사원의 예절', '여자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희망', '재미있는 친절 서비스', '부드러운 여자가 남자를 지배한다', '밤은 낮보다 짧다', '나는 나에게 목숨을 건다' '정덕희의 說, 수다,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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