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전격적인 사임 발표로 전 세계가 충격과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종신 임기가 보장된 교황이 중도에 자진해서 성스러운 그 무게를 내려놓는다는 건 흔치 않다. 가톨릭의 오랜 전통을 깨고 선종(善終)하기도 전에 성좌에서 내려온 것은 598년만이다. 엄중한 자기성찰에서 비롯됐다. 진솔한 용기가 없었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퇴위 발표문에서 "고령으로 교황직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담담한 심정을 밝혔다. 복음을 전파하려면 몸과 정신의 기력이 모두 필요한데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교황은 사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물러나는 게 '의무'라는 그의 평소 소신이 더욱 돋보인다. 교황은 분명 물러날 때를 알고 있었다.

쥐꼬리만한 권력의 그늘에서 양심이나 소신 따위는 뒷전인 채 온갖 특혜 누리기에 전전긍긍하는 세속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기만 하다. 더 큰 권력을 간구하기 위해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정권 이양기를 맞는 요즘 입신양명을 노리다가 인물 검증과정에서 세상 민심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도리어 화려했던 자신의 이력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도 속출하고 있다.

적어도 동양사회에서는 공직에 나아가거나 물러날 때를 잘 분간해서 거기에 맞는 처신을 하지 않으면 소인배로 몰렸다. 공직 제의를 받더라도 그걸 덥석 물지 말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으면 사양을 하는 게 옳다. 물러날 때는 뭉그적거리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라. 중국 북송 시대 사마광의 말이다. '출처진퇴'(出處進退)가 분명하지 못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가. 평생 쌓아온 자신의 명예에 흠집을 자초하는 사람들의 유형 또한 다양하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지명된지 41일만에 자진 사퇴했다. 위장전입 의혹, 증여세 탈루 의혹, 공동저서 저작권법 위반 의혹, 업무추진비 주말 사용, 가족동반 해외출장, 특정업무경비의 사적 유용 논란 등 각종 의혹이 연일 불거졌다. 그럼에도 각종 의혹을 명쾌하게 해명도 않은 채 헌재소장에 집착하다가 낙마했다. 법조계 내부에서 조차 불신하는 인물을 헌법기관 수장으로 앉히려는 정치권의 발상 자체가 문제였다.

김용준 인수위원장의 경우는 총리 인사청문회 절차에 들어가기도 전에 총리지명을 스스로 반납한 케이스다. 두 아들의 병역 면제에다 부동산 구입경위와 세금 납부여부, 증여 경위 등도 석연치 않았다. 민감한 국민여론을 의식했다면 이럴 순 없다. 그간 대처 방식이 안이하기 짝이 없다. 이리저리 보아도 인사 검증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앞으로 고위 공직 후보자들의 인사 청문회에서 또 어떤 추악한 맨얼굴이 드러날 것인지.

박근혜 정부의 출범 1주일을 앞두고도 새 내각 꾸리기조차 버거워 보인다. 오늘 국회본회의를 앞두고 어제 3차 내각 명단 11명을 지명했으나 논란거리를 남겼다. 정부조직개편안이 처리되지도 않았는데 신설부처 장관들이 지명돼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회 경시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회처리 1차 시한인 14일을 넘긴 후 여야 협상이 진행 중이어서 정치권이 예민한 상황이다. 인사청문회가 늦어질 경우 이명박 정부의 장관들로 내각을 꾸리는 어색한 일도 벌어질 판이다.

정권 출범 초반부터 정치적인 리더십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민들로서는 비록 세상 살기가 힘들수록 뭔가 비전이 있는 삶이라도 갈구하기 마련이다. 살아 숨쉬는 감동과 소통 그리고 공감하는 국정이 펼쳐져야 할 것이라는 국민적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다. 오는 20일 국정과제도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향후 5년 성공한 정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비상한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