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사업 '트라우마'에 멍든 민심,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맴돈다
정치권 오만·횡포… 역풍 맞기 십상

이명박 정부가 충청지역민에게 남긴 '정책 트라우마'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대표적인 게 ‘세종시 원안 뒤집기’이었다. 논란 끝에 2010년 6월 29일 국회에서 '수정안'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선지 대통령은 세종시를 아직도 방문하지 않고 있다.

또 하나 과학벨트 문제를 들 수 있다. 당초 대선공약에서 제시된 과학벨트는 세종시-대덕특구-오송·오창 단지를 하나의 광역경제권으로 발전시켜 대한민국의 실리콘밸리로 육성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지난해 2월 1일 신년방송좌담회에 나와 대선 공약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당시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과학벨트 충청권 공약이 버젓이 게시돼 있었는데도 공약집에 없다고 우겼다. 민심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그러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대통령의 발언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이례적인 반박 성명문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정치지도자가 정략적 접근으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거나, 표를 얻기 위해 고의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비판했다. 국정운영 리더십의 위기를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꼴이었다. 당시 과학벨트 대선공약을 번복할만한 급박한 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실체를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이른바 '날치기 예산' '형님 예산'에서 드러났듯이 포항 배려설을 부인하긴 힘들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과학벨트 거점지구를 대전에 두고 기능지구로는 세종·천안·청원을 선정했지만 실상은 대전-대구·울산·포항-광주로 분산 배치, 나눠먹기 형식으로 결정된 과정에서 그런 의혹이 읽힌다.

내년도 정부 예산 배정액을 보면 포항 4세대 가속기 예산 증가율이 전년대비 88%나 늘어난 반면 과학벨트 중이온가속기 예산 증가율은 고작 7.7%에 그쳤다. 게다가 정부는 과학벨트 부지 매입비용을 대전시에 떠넘기려 한다. 과학벨트의 정책목표가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수단인 점, 국책사업 추진 체계에서 보더라도 사업비는 전액 국비 부담이어야 옳다.

과학벨트 입지로 선정된 지역에도 많은 수혜가 돌아가므로 대전시도 일정부분 분담해야 한다는 게 정부 논리이지만 그건 아전인수격 발상이다. 당초 사업 선정 이전에는 그런 계획 자체가 없었다. 사업 선정 이후 이를 뒤늦게 들고 나온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다.

새만금개발사업, 오송생명과학단지 조성사업 등에서 보듯이 국책사업에서 토지매입비를 지자체가 분담한 전례가 없다. 정부가 정책의 일관성, '신뢰보호의 원칙'을 또 다시 정면으로 뒤집으려 안달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정부 정책을 믿고 따르는 국민을 무시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건 정부의 또 다른 오만이자 횡포가 아닌가.

그런 가운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과학벨트 부지매입비와 관련, "(대전시에서) 할 수 있는 한도에서 능력껏 하고 나머지는 국가가 지원해야한다"는 입장을 밝혀 민심이 들끓고 있다. '대전시 부담이 없는 한 과학벨트 사업이 지연될 수 있다'는 지난 2일 김황식 국무총리의 발언이 나왔던 터라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세종시 원안을 고수해왔던 박 후보의 전력으로 볼 때 '대전시의 능력껏 부담 발언'은 다소 의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고도 "대전시의 입장을 존중하고 지원하기 위한 뜻"이라고 해명하니 어느 나라 셈법인지 도무지 모를 지경이다. 현 정부의 과학벨트 운영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닌 입장이라면 이를 소상하게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

더 이상 충청지역민을 흔들지 말라. 그러다가는 역풍을 맞게 돼 있다. 어떤 대선 후보가 됐건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충청권 주요 현안 공약화에 대한 지역요구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들의 공약 중 실속 있는 내용을 찾기 힘들다. 두루뭉술한 개념들로 포장돼 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그럴수록 엄중하게 평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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