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매트위 구르며 '영원한 레슬러' 꿈꾼다

싸늘했던 체육관이 일순 젊은 혈기에서 뿜어 나오는 함성 소리로 가득 찬다.
딱 벌어진 어깨, 다부진 몸매와는 달리 공놀이로 몸을 푸는 모양새는 천상 또래의 순수함과 다르지 않았다.
시범단격인 삼성생명 선수들과 나란히 한 그에게는 현역 시절 못잖은 투지와 자신감이 묻어났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한 한국 레슬링 사상 첫 그랜드슬래머 박장순(朴章淳·34·삼성생명 코치)씨.

그를 만난 것은 지난달 27일 그의 모교인 대전체육고등학교에서였다.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곁방살이의 설움을 겪었던 곳, 그러나 레슬링에 대한 애착과 '한 번 해 보자'는 뚝심을 심어준 곳이기에 대전체고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박씨가 처음 레슬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다.

씨름으로 충남을 호령한 아버지(박종석·68)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운동신경만큼은 타고났다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애초 씨름을 하려고 했지만 체구가 작았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당시 대전체고 김효근 감독의 슬하에 들어갔다.

레슬링부가 없는 보령 청웅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별수없이 대전과 집을 오가는 두 집 살림을 시작했다.

"주말과 휴일, 방학 중에는 원신흥동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부모님의 관심과 보살핌도 대단했어요. 하지만 품을 떠나 지내야 하는 고달픈 생활은 저의 몫이었지요. 덕분에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레슬링 입문 3년 만인 83년, 소년체전 금메달을 따내자 이목이 쏠렸다.

정해진 수순대로 대전체고에 입학했지만 제대로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했다.

체급조절에 실패한 탓일까, 3년 내내 슬럼프에 빠지니 당돌하리만큼 침착하고 승부욕도 남달랐던 그도 좌절의 쓴맛을 면할 길이 없었다.

"'아직 항해도 안 했는데 벌써 돛을 내리느냐'는 아버지의 질책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듭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지요."

제대로 된 메달 하나 건지지 못한 선수에게 대학입학이 호락호락할 리 없을 터, 결국 잘나가는 친구 따라 곁다리로 한국체대에 입학했다.

일찍 찾아 온 슬럼프를 별 탈 없이 넘긴 것이 오히려 약이 됐던지 대학입학 직후부터 점점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87년 국가대표 선발전은 그의 이름을 레슬링사에 올린 원년.

56㎏에서 두 체급을 올린 박씨에게 버거운 상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주택공사 김수환 선배가 동급에서 최강으로 꼽혔어요. 1차전에서 패한 뒤 10분간 기절을 했을 정도로 저에게는 높은 벽이었지요."

오뚝이 같은 불굴의 정신은 최종 3차전에서 테크니컬 폴승이라는 믿기지 않는 승리를 일궈냈다.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숱한 고생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 87년 파리 세계선수권에서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국제무대에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레슬링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올림픽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의 메달박스이자 효자 종목.

홈 코트에서 열린 88년 서울 올림픽 역시 레슬링에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그러나 신예 박장순에게서 메달을 건질 수 있다는 전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강호들을 연파하며 결승전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세계선수권 7회 우승의 전무후무한 금자탑을 쌓은 소련의 카자예프 선수.

비록 4-1 판정패로 금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시상대에 오른 그는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었다.

"가문의 영광이었죠. 스포트라이트의 맛을 처음 본 것 아닙니까. 이를 계기로 더욱 열심히 운동해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자는 오기도 발동하더군요. 기대주로 부상한 부담감도 적잖았지만요."

그의 최대 강점은 낙천성과 대담성. 안방 올림픽에서 찾은 그 강점은 막힘없는 질주의 밑천이 됐다.

90년은 명실공히 체급 세계 최강의 자리를 확인한 의미 있는 해, 북경 아시안게임을 접수한 뒤 US오픈에서 카자예프 선수와 정면승부를 펼쳐 깨끗이 설욕했다.

그리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무패신화의 주인공이 연패를 당하더군요. 갈 때를 알고 가는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92년 74㎏으로 한 체급 올려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정복한 그는 93년 세계선수권마저 석권하며 강자의 면모를 이어갔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복병에게 일격을 당하며 잠시 주춤했지만 이듬해 아시아선수권을 제패, 한국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리고 은퇴를 결심했다.

"목표를 100% 달성했으니 명예롭게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팀(삼성생명)이 저를 원하더군요. 간판스타가 없다면서 말입니다. 애틀란타 올림픽만 가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죠. 애틀란타 은메달이 저에게는 가장 값진 메달이니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15년의 선수생활은 그렇게 화려한 막을 내렸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촉탁을 받은 삼성생명에서 지도자의 길에 든 그는 '훌륭한 선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는 계통의 불문율마저 깨고 있다.

97년부터 팀 코치와 함께 국가대표를 맡아 후배들을 지도하며 효자종목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레슬링을 하는 후배들이 줄어 걱정입니다. 3D 운동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도전정신만 있다면 보람을 만끽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즐겨 씁니다. 메달 밭을 일구는 사명감과 의무감을 담보한 프로 정신이 필요해요."

바쁜 일과 중에도 그는 올해 한국체대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강단에 서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론도 갖춘 존경받는 레슬러에 더욱 구미가 당긴다.

매트 위를 힘차게 구르는 그는 오늘도 영원한 레슬러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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