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덕규 영문월간 외교(Diplomacy) 회장

필자는 “효(孝)사상은 영원한 수출품목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에 효도(孝道)라는 단어가 빠진 이래 1981년 10월 필자가 국회 예결위원회에서 김정례 보사부 장관에게 "효자 효녀 효부를 발굴해서 표창함으로써 효도운동을 전개하라"고 강력히 주장한 것을 김 장관이 즉각 받아들여질 때까지 효도라는 단어가 전혀 공적으로 쓴 일이 없다.

1968년 12월 3일 국민교육헌장공포(12월 5일) 직전 헌장추진위원장 박종홍 박사(청와대 사회담당 특보)는 전국 언론계 대표 약 5~60명의 논설위원 편집국장들을 영빈관(현 신라호텔)에 초청하여 국민교육헌장 확정문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필자는 신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참석 "초안에는 ‘효도’가 들어있었는데 왜 효도를 빼고 그 자리에 ‘경애’를 넣었습니까?"라고 질문한 바 있다. 박 박사는 가볍게 "효도는 구닥다리라고 해서 뺐습니다"라고 답변을 하였다. 필자는 다시 일어나서 "어떻게 해서 효도가 구닥다리입니까. 신체발부는 수지 부모요 불감훼상이 효지시야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건강하게 사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입신양명 이현부모 효지 종야라. 훌륭하게 살아서 부모이름까지 빛내드리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

한마디로 말하면 효도란 첫째, 건강하게 살아라. 둘째, 훌륭하게 살아라. 이런 뜻으로 시공을 초월한 진리인데 어떻게 효도를 구닥다리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하였다.

박종홍 박사는 약간 당황하면서 "아니 젊은 논설위원이 언제 그렇게 효도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셨어요"하고 넘어갔고 원문대로 공포를 하였다.

1년 후에 박 박사는 필자를 청와대로 초청 ‘효도’를 뺀 것을 후회하였다. 필자가 "효도를 넣어야 한다"는 세미나를 하겠다고 했더니 기뻐하면서 "꼭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개정을 못하고 타계하였다.

필자는 1973년 9월 영국정부 초청으로 런던 방문 중, 일체 인터뷰를 안 한다는 20세기 서양의 최고 석학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교수를 만났다. 필자가 한국의 효사상, 경로사상과 가족제도를 설명한 다음 토인비 교수의 고견을 물었다.

86세 된 노 석학 토인비 교수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임 선생. 우리도 옛날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가정이 파괴되었어요. 듣고 보니 효사상은 인류를 위해 가장 훌륭한 사상이니 한국에서 영원히 보존할 뿐 아니라 서양에 와서 캠페인을 벌여주세요. 나도 열심히 도와 드리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인생이란 자식은 부모를 저버릴 수 있는 것 같은데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어요. 우리 아들이 400km 멀리 떨어진 욕샤에서 교수로 있는데 내년에 비록 한국처럼 같은 집은 아니지만 가까이 이사 가서 전화라도 자주하며 살려고 해요"라고 간곡하게 효사상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후 토인비 교수는 아들이 있는 곳, 욕샤로 이사를 하였고 1975년 88세로 타계하여 효도 캠페인은 못하여 아쉽게 되었다.

필자는 영국, 독일과 미국의 양로원과 노인 아파트도 방문 한 바 있다. 서양 노인들은 쓰다버린 자동차처럼 버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노인들의 분위기는 거의 서양분위기로 되어가고 있다.

필자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란 '노인이 행복하게 느끼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 200여 나라 중 경제발전의 모델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이제 효사상을 고취하고 실천하여 도덕적으로도 세계적인 모델 국가로 만들자고 제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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