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언론자유 신장' 앞장

▲ 구월환 전 주필

"조상의 선비정신을 제대로 계승했다면, 충청도에서 벌써 대통령도 나왔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때의 통계상 전국에서 충청지역에 양반과 선비가 가장 많이 살았고, 이순신, 최익현, 이봉창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 비춰 볼 때, 충청지역은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정치적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봅니다."

서천 출신의 세계일보 구월환 전 주필은 조상의 선비정신을 후손이 제대로 계승하지 못해 충청권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고, 수세에 몰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며 안타까워한 후 '견리사의(見利思義·나에게 이로울 만한 일을 보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생각하라)'의 선비정신을 재차 강조했다.

옛날 조상은 지역에 대한 분명한 자존심이 있었다고도 했다. 구 전 주필 또한 첫마디가 "내겐 충청 출신이라는 자존심이 있다"는 거였고,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마치 기자에게 그런 인식을 주입시키듯 여러 차례 이 문구를 반복했다.

구 전 주필은 서천군 마서면 장선리에서 태어났고, 장선초등학교와 서천중학교, 공주사대부고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왔다.

집에서 15리 길의 서천중학교를 3년 내내 걸어서 통학했던 구 전 주필은 지금의 건강을 그때 열심히 걸어 다닌 덕분이라고 말했다.

형이 공주사대에 입학하자, 학비 절감 차원에서 공주사대부고에 입학했다. 2회 입학생이었다. 이 학교는 매달 시험을 보고, 1등부터 꼴찌까지 이름을 적어 교무실 벽에 붙여 놓았다. 망신당하는 것이 싫은지 학생들간에 오기심이 발동, 열심히 공부한 덕에 지금과 같은 명문고가 됐다.
구 전 주필은 이 학교에서 서울대 입학 첫 테이프를 끊는 영예를 안았다. 동기 4명과 함께였다. 학교가 또 한번 뒤집혔다. 철학과를 택하려다 사회학과를 택한 구 전 주필은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60학번인 그는 그해에 터진 4·19 혁명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당시 문리대 캠프 내에 있는 마로니에 광장에서 동료 선후배들과 국가와 사회를 주제로 많은 토론을 벌였다.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 제대로 가기 위해 고쳐야 할 것들 그리고 학생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구 전 주필은 그러나 현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여 불의에 맞서는 행동파는 아니었다.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은 사회인이 될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지 6년 후인 1967년 1월 4일, 구 전 주필은 합동통신 견습 4기 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년 동안 마음속에 축적해 둔 성향·신념을 밑천삼아 '언론자유 운동'을 시작했다.

3선 개헌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정권 유지를 위해 언론에 대한 탄압도 점차 심해졌다. 마침내 69년 3선 개헌이 현실화됐다. 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개헌'이라는 말만 꺼내도 징역 15년을 선고하는 시대가 됐다.

구 전 주필은 중세기 이후 처음 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라고 조소했다. 이때 기자들은 쓸 것을 못 쓰고, 취재도 안되며, 설령 취재를 해도 기사화되지 않았다. 악착같이 쓰는 기자들이 있다면, 그는 사주를 통해 좌천·해고되거나 심지어는 구속까지 됐다.

1974년 정칟언론·문화예술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국적 유신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24일에 터진 '동아언론자유 실천선언'은 언론계의 유신철폐 운동 단초가 됐다. 이때 기자협회가 새롭게 구성됐고,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이던 김병익씨가 회장이 되었다. 홍사덕 당시 중앙일보 경제부 기자도 이 대열에 동참했고, 구 전 주필은 합동통신 사회부 기자 겸 통신사 대표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들의 타협없는 투쟁이 지속되자, 정부는 기자협회보를 폐간시켰다. 그러자 기자들은 등사판을 직접 긁어 임시 회보를 찍어냈다.

정부도 물러서지 않았다. 동아·조선일보 기자 100여명이 대량 해고됐다. '동아투위', '조선투위'는 이때 생겼다.

취재보도의 자유와 언론사를 출입해 편집을 통제하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철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자, 기자들이 남산으로 연행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구 전 주필도 4박5일 동안 지하실에 감금돼 고초를 겪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베트공에 함락되고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언론자유 운동 및 반 유신 운동은 된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종말을 고했다. 그 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7년간의 또 다른 독재가 문을 열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적인 비극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고, 노무현 정권이 만들어진 것도 이런 시대의 반작용에서 비롯됐다고 구 전 주필은 말했다.구 전 주필은 "독재 시절 가장 심한 탄압을 받은 대상은 언론계"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과 전 대통령 시절까지 15년 이상 언론을 탄압했던 주역들이 한마디 사과없이 아직도 정치권에 남아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오늘 날 소위 보수세력이 겪는 고초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원망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사과없이 특권만을 누려 왔기에 '역사적인 필연'이라고 했고, '세진상봉원(勢盡相逢怨·세력를 잃으면 원망을 만난다)'이라는 한마디로 구 전 주필은 현실을 날카롭게 적시했다.

현 노 정권에 대해서도 도덕적인 우월성은 있으나, 경륜·능력·지혜가 부족해 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비판했다. 난국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노하우와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을 꼬집었다.

37년간 언론계에 몸담아 왔던 구 전 주필은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날마다 새로운 기사를 발굴해야 하고, 마감시간에 쫓겨야 하기에 '피가 마르는 직업'이고, 정신과 육체적 노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면에서 가장 난이도 있는 직업 중 하나라고 했다.

충청인으로서의 자부심에 뿌리를 두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최선을 다한 뒤 하늘의 심판을 기다린다)'을 좌우명 삼아 오늘에 이른 구 전 주필.

그는 '애국지사들의 정신적 유산'을 제대로 계승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럼으로써 역사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해 온 '충청'의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구월환 전 주필은…
▲1942년 서천 출생
▲1960년 공주사대부고 졸
▲1967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
▲1967년 합동통신 사회부 기자 ▲1974∼75년 기자협회 부회장 ▲1975년 합동통신 정치부 기자 ▲1984년 연합통신 정치부장 ▲1987년 연합통신 영국특파원 ▲1992∼1993년 관훈클럽 총무 ▲1993년 연합통신 지방국장직대 ▲1995년 연합통신 기사심의실장 ▲1997∼1998년 연합통신 총무·출판담당 상무이사 ▲2000년 세계일보 편집국장 ▲2002년 세계일보 논설위원실장 ▲2002년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현) ▲2003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이사(현)▲2003년 1월∼2004년 3월 세계일보 이사대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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